posted by isaiah_43 2011. 7. 5. 02:43
수만명을 강연으로 만나보니

 
 記者는 지금 힘겨운 수행 중이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강연을 통해서 만나는 이들은 매주 최소 500여명. 많을 땐 수천 명이 넘지만 밥 사주며 찾아 가는 소그룹 모임이 잦아 총계(?)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보수층 이외의 다양한 그룹,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나며 民心(민심)을 살필 기회를 갖는다. 지난 1년 동안 수만 명을 만난 후 내린 소결은 이렇다. 
 

 1. 北韓인권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記者는 평소 한국인 심성이 선하며, 북한의 2400만 동족 노예에 대한 침묵은 無知(무지)의 결과로 생각해왔다. 진실을 알리고 사실을 전하면 변화할 것으로 믿었다.  
 이런 믿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北韓인권의 참담한 상황을 사진·영상·증언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전해도 마음이 움직여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5% 미만이다. 
  어딜 가든 유사하다. 통상 기독교인이 北韓인권에 관심을 보이지만 일반 교회는 北韓인권에 冷冷(냉랭)하다. 이런 무관심은 大型(대형)교회로 갈수록, 소득수준이 높은 곳일수록 심하다. 
  교회에서 北韓인권을 말할 때면 신도들 앞에 거대한 장벽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福(복)을 빌러 왔는데 왜 남 얘기를 하느냐?’는 눈빛부터 ‘끔찍한 얘기 좀 집어치우라’는 것 같은 눈빛 등 다양하다.  
 교인은 그나마 낫다. 목사님·장로님 상대로 한 강연은 곤혹스럽다. 100명이 모이면 1~2명은 “왜 교회에서 정치 얘기를 하느냐”는 항의를 하고, 아예 “내려오라”고 따지는 이들도 여러 번 만났다. 모두 교회였고 목사였고 내가 전한 것은 가련한 북한동포를 해방하자는 말이었을 뿐이다. 
   경험측상, 北韓인권에 열린 집단은 ‘세상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기독교 모임 내지 작은 교회, 또는 청년 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맞춰 살기 위해 양심의 영역이 ‘비대칭적으로’ 발달된 이들이다. 그런 곳은 北韓인권 이슈를 리포좀이 물 빨아들이듯 흡수하곤 한다. 세상은 이래서 썩지 않는가 싶었다. 
  

 2. 안보에 무관심
 
 愛國집회에 나오는 확고한 보수층 이외의 중간지대 국민들은 놀라울 정도로 安保(안보)에 무관심하다. 핵무기·미사일 사진과 영상, 아무리 떠들어 주어도 반응은 대부분 얼떨떨해 한다.  
 청년층은 심각하다. 그들은 安保문제에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북한과 적당히 ‘화해·협력’하는 게 좋다는 얄팍한 생각을 드러낸다.  
 그나마 나은 집단이 학군단, 軍장교, 공안기관 같은 곳이지만 이곳 청년들 역시 너무나 생소한 개념에 충격을 받는다기보다 의아해 한다. 
  예를 들어 보자. 記者가 어디서 강연을 하든 10·4선언의 “서해평화협력지대”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 20대는 만나 보지 못했다. 초·중·고교 시절은 물론 대학에서도 북한을 친구로 여겨온 데다 천안함·연평도 사건도 돈과 쌀을 줘야 평화가 온다는 좌파의 선동이 거세니 분별을 못한다. 몇 달 전 어느 청년우파 단체에 강연을 갔는데, 강연 직전 설문을 해보니 80%가 자유통일이 아니라 연방제 통일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안보에 관심을 보이는 집단은 전쟁체험세대인 이른바 보수층이 유일했다. 요즘은 천안함·연평도 효과도 ‘약빨’이 다 떨어져 버린 것 같다. 전 국민의 70% 정도는 될 중간층 대부분 안보에 둔감한 상태니 愛國心에 호소를 해도 ‘소귀에 경 읽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3. 자유통일에 대한 격렬한 반응
 
 역시 ‘경험측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겠지만, 北韓인권에 무관심하고 安保문제에 둔감한 중간지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유일한 이슈는 ‘자유통일’이었다. 기독교인이건 非기독교인이건 마찬가지고 청년층은 더욱 그러하다.
  잠자던 청중도 통일비용이 아니라 통일이익, 북한재건과 북한특수를 통한 통일강국의 비전에 두 눈을 번쩍 뜬다. 북한이 열리면 경찰·군인·공무원 인력이 파견돼 진급할 것이고 기간제·임시제 교사가 교장선생이 되며, 시간강사가 대학교수가 되는 강대국 실현의 기회가 올 것이라는 말에 귀 기울인다. “김정일이 다 죽었는데 한 방만 걷어차 버리자” “자유통일은 청년실업·장기불황을 30년은 날려버릴 것이다”라는 웅변(?)에 박수친다. 
  양심이 무뎌진, 애국심이 사라진 이 惡(악)하고 淫亂(음란)한 세대를 이끌어 갈 苦肉之策(고육지책)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땅의 백성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산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련의 터널을 벗는가 싶더니 다시 또 비전이 사라진 이 나라 국민은 북한의 절망적 현실은 보기도 싫고, 안보가 무너져 빚어질 재앙도 듣기 싫은 것 같다. 지금 당장 잡아 챌 希望(희망)은 아니어도 김정일 멸망 이후 오게 될 希望 찬 통일강국의 비전에 관심을 보이고 때로는 갈채를 보낸다. 
  양심이 무뎌지고 애국심이 사라진 그러나 상처 많고 가련한 이 땅의 대중은 慰勞(위로)를 원한다. 때론 좌파의 破壞的(파괴적) 변혁에 귀 기울이지만 記者가 전하는 創造的(창조적) 변혁에 무릎을 친다. 어쩌면 나 역시 북한의 2400만 동포에 대한 사랑만큼 이 나라 국민을 사랑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의 강연은 ‘백성을 향한 위로’가 되었다.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무어라 부르건...이승만의 건국혁명, 박정희의 근대화혁명을 잇는 60년 대한민국의 성취는 또 다른 英雄(영웅)의 통일혁명으로 완성될 것이다. 내가 받아 온 조롱과 비웃음, 경멸과 욕설은 조국이 英雄을 부르는 하늘의 나팔 소리였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불확실한 시대, 불확실한 미래에 확신을 줄 신념이요, 용기이며, 慰勞者(위로자)다. 나는 소녀처럼 부푼 마음으로 英雄이 올 내일을 기다린다.


김성욱 /리버티헤랄드 대표, 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 /2011.07.04 06:46:13

'follow Jesus > 발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난민  (0) 2012.03.09
로버트 하이들러/누가 기독교의 뿌리를 바꾸었나  (0) 2011.08.18
말의 힘  (0) 2011.06.01
다리/예수님의 사랑  (0) 2011.05.04
재림이 이르기까지 전도자의 바른 자세  (0) 2011.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