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isaiah_43 2011. 4. 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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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31. 23:47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어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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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31. 02:55


쉐마 본문의 목적 - Godship, Sonship,  


 
그리스도인들이 중요시하는 이유는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질문을 받으셨을 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으로 공표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이 구절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아주 중시하였다. 쉐마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쉐마는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민수기 15장 37-41절의 두루마리 성경의 짧은 세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어 유대인들의 기도 관습에 따라 매일 아침과 저녁때 마다 암송되어졌다.

쉐마를 매일 기도 때만 암송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18개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는 기도문에 포함시켜 쉐마를 또한 암송했다. 아침에 한번, 점심 때, 또 저녁 때 한 번씩 하루에 세번씩 18개 기도문을 암송했다.

유대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기도를 진지하게 했다. 매일 실시하는 쉐마와 18개의 기도문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매 순간을 기도로 꼴 지웠다. 그렇게 식사 전후와, 빛, 불, 번개 등과 관련하여 항상 기도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월삭, 혜성이나, 비, 폭풍이 일 때와 바다, 호수, 강을 볼때, 좋은 소식을 접했을 때, 새 가구를 사고, 이사를 오고 갈 때 등, 늘 기도가 있었다. 모든 일이 기도와 함께였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여기서 꼭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신성성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의 삶이 기도로 충만해야 한다.
 

- 조지 R. 나잇(George R. Knight)

 


 




1. 쉐마 본문

1.1. 본문의 배경

 

쉐마의 선포의 배경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고백에 있다.

 "우리가 다 듣겠습니다."

 
[신 5: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게서는 선포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쉐마)"

 

[신 6: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 7: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1.2. 3개의 쉐마 - 하나의 내용


3개의 쉐마가 있지만, 하나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라.
 

거기에 덧붙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쉐마"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어떤 뉘앙스가 풍기는 말조차도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신명기의 쉐마를 다시 반복하셨다.

 

(1) 신명기 6장 5-9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2) 신명기 11장 13-21절

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

 

(3) 민수기 15장 37-41절

15: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5: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15:39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15:40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15:41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4) 예수 그리스도의 쉐마

율법에 대한 가장 중요한 600개가 넘는 계명들에 대한 논의는 1세기 랍비적 토론의 특징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가장 큰 계명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 예수에게 던져졌다(마 22:34-40, 막 12:28-34)

 

마태복음 22장 34-40절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가복음 막 12장 28-34절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쉐마"라는 말은 "들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2.1. 지성소에서 부르심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민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2.2. 하나님의 들으심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다.

[창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창 21: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 30:17]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출 2: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민 2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붙이시매 그들과 그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2.3.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출 16: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8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민 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신 4: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3. "들음"은 "순종"이다. 들음이 믿음이다.

 
 

3.1. 들음은 하나님의 명령과 관계되어 있다.

[민 9:8]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어떻게 명하시는지 [내가 들으리라]

[신 4:12]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 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3.2.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이다.

[신 13:1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신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3.3. 하나님의 명령은 순종을 기대하고 선포되어진다.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출 24: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창 26: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창 27: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대로

[창 28:7]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창 37: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창 39: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출 16: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 23:21]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22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찌라

[민 27:20]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3.4. 그래서 “들음”이 믿음이다. 그 들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계명 순종이다.

[출 4:1]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출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신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 5: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신 11: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신 12:28]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

 

 

3.5. 들음은 억지 순종이 아니라, 좋게 여김이다. 그래서 믿음이다.

[레 10:20]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민 14:22]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4.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신 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 8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 11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4.1. 모든 죄악과 불행이 시작된다.

인류의 불행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탕자의 불행

[신 21: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확대되는 불행 - 인간의 자율성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가나안을 앞둔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순종
 
[신 1:34]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43 내가 너희에게 고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천자히 산지로 올라가매... 45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가나안 코 앞,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배도, 반역

[신 9:1]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2 그 백성은 네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그에게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신 9:23]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얻으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4.2. 청종치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 진노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다.


아직도 기회는 있다.

 
[레 26:14]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18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배나 더 징치할찌라.... 21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찐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7 너희가 이같이 될찌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찐대

[신 8: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Godship - 하나님은 말씀(명령, 계명)하신다.  

[신 26:14] 내가 애곡하는 날에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17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

 

   Sonship - 하나님의 자녀는 듣는다(순종).  

[신 27:9]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찌니라....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 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Relationship -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들어간다. 

[렘 30:4] 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9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10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1)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21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 22 (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이 새언약이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3)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신 30: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출처: http://blog.naver.com/achilee/26090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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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큰 보자기 모양의 쇼올을 머리에서 어깨까지 두른다.  잘 살펴보면 보자기 아래 끝 부분에 술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술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찌찌트라 하며, 찌찌트가 달린 보자기 모양의 쇼올을 가리켜 탈릿이라고 한다.  정통파 유대인의 경우 결혼한 남자만 사용할 수 있으나 보수파나 개혁파에선 성인식을 마친 모든 유대인 성인에게 사용을 허락한다.  여자의 경우 기도할 때 탈릿을 반드시 사용하여야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명문화시켜 금하지도 않는다.  정통파 유대인 여자들은  법으로 금하진 않으나 탈릿 사용을 꺼리는 편이며, 그 외의 보수파나 개혁파에선 여자용 탈릿을 따로 개발하여 사용하는데 남자용에 비하여 그 모양 및 색상이 다양하다. 



탈릿(기도보)의 구조와 용도

  보통 가로 1.5 미터 세로 0.6 미터 정도의 탈릿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가로 1.8 미터 세로 0.9 미터 혹은 가로 1.8 미터 세로 1.2 미터까지의 탈릿도 흔히 사용되는 것을 볼수있다.  기도보(탈릿)의 크기가 일정한 규격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규칙이 있다면 스카프가 아니가 쇼올을 두른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한다.  몸을 쉽게 감쌀 수 있는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도보(탈릿)의 크기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반드시 탈릿을 두르도록 규정되어있다.  이는 기도자가 기도할 때 자기의 몸을 탈릿으로 감싸므로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릿은 기도자를 외부와 차단하여 주는 역할을 한다. 

탈릿을 사용함으로써  기도자는 쉽게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  천의 재료는 무명이나 모로 만든 것이 사용되며 비단도 허용된다.  그러나 두가지 이상의 재료를 섞어 짠 천은 탈릿의 재료로 사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무명과 모를 섞어 짠 천은 금기이며 기도보의 재료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비단은 무명이나 모 어느쪽과 섞어도 무방하다. 



찌찌트(술)의 구조

  유대인의 탈릿을 잘 살펴보면 아래 부분 네 귀퉁이에 술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있다.  이 술을 가리켜 찌찌트라 한다.  유대인들은 민수기 15:37-41에 근거하여 반드시 탈릿(기도보)에 찌찌트(술)를 단다.  술이 달리지 아니한 탈릿(기도보)은 단지 보자기일 뿐 탈릿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탈릿이 탈릿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찌찌트(술)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많은 유대인들은 성인식 일주일 전에 찌찌트(술)가 달리지 아니한 탈릿을 아들에게 선물하여 미리 그 사용법을 가르친 후, 성인식날 찌찌트를 단 탈릿을 처음으로 사용한다.  탈릿을 머리에서 어깨로 둘러 온 몸을 감싼 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된 13세의 유대인, 그는 비로서 하나님과 기도를 통하여 독립적으로 이야기 할 수있는 특권을 그날부터 평생 행사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는 단순히 늘어뜨린 장식실로 보이는 찌찌트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찌찌트를 만드는 과정과 그 구조를 이해한다면 왜 유대인들이 찌찌트를 그렇게 중히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본인이 직접 자신의 찌찌트를 만들어 쓸 것을 권장한다.  찌찌트(술)는 탈릿 양쪽 끝단 네 귀퉁이에 부착한다.  탈릿의  아래부분 양쪽 끝에서부텨 가로 세로 5 cm 안쪽에서 수직선을 그어 만나는 점에 구멍을 뚫고 술을 단다.  오른쪽 양쪽 끝에 두군데 왼쪽 양쪽 끝에 두군데 모두 네군데가 된다.  술을 만드는데 쓰는 재료(실)는 보통 유대인 책 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한 조에 16 가닥의 실이 들어 있는데 네 개는 길고 열 두개는 짧다.  먼저 할 일은 긴 실 하나에 짧은 실 세개 씩 네 개의 조로 나눈다.  긴 줄을 가리켜 샴마쉬라 하며 아래의 설명과 같이 짧은 줄을 감는데 쓰인다. 트찌찢(술)을 만드는 방법 은 다음과 같다 .
 
먼저 그림에 나타난 바와 같이 겹 매듭을 먼저 만든 후 긴 줄(샴마쉬)로 짧은 줄을 일곱 번 감아준고 다시 겹 매듭을 만든다.  동일한 방법으로 긴 줄로 여덟 번 감아 주고 겹 매듭을 만들고 다시 열한 번 감아준 후 겹 매듭을 만들고 열세 번 감아준 후 마지막 겹 매듭을 만든다.  다시 마지막 겹 매듭을 만든 후 매듭 밑으로 여덟 가닥의 줄을 늘어 뜨린다.  끝으로 여덟 가닥의 줄을 한줄로 정렬한 후 조금이라도 긴 줄은 잘라내어 같은 길이로 마무리한다.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찌찌트의 술을 정렬하여 같은 길이로 맞출 때에 가위나 칼을 사용하여 잘라내는 것은 금물이며 반드시 이빨로 물어 뜯어 길이를 맞추어야 한다.  탈릿을 오래동안 사용하다보면 흔히 찌찌트의 어느 한쪽이 먼저 달아 술의 길이가 일정치 않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에는 이빨로 긴 쪽을 수시로 물어 뜯어 길이를 일정하게 맞추어야 한다.  가위나 칼의 사용은 이때에도 금물이다. 



찌찌트의 의미

 유대인들은 찌찌트를 만들 때 위에 제시된 모든 숫자를 엄밀하게 지킨다.  실을 한 번 더 감지도 덜 감지도 않는다.  모든 숫자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그 숫자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찌찌트를 만들 때 처음에 일곱 번과 여덟 번을 감아준다고 하였는데, 일곱 번과 여덟 번의 합은 열다섯이다.  유대인의 숫자 계산법에 의하면 십오라는 아라비아 숫자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抑 중 ㏛  를 대표한다 .  다음 열 한 번 감아준다고 하였는데, 열 하나라는 숫자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抑 중의  ? 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일곱 번 감고 여덟 번 감고 열 한 번 감는, 이들 숫자의 합은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抑 에 상응하는 숫자의 합과 같다.  이런 연유에서 찌찌트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찌찌트를 보는 유대인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 
 
다음에 열 세번을 감는다고 하였는데 십삼이란 숫자는 '하나'를 뜻하는 히브리어 暹  를 대표한다 .  따라서 이들 전체의 숫자를 히브리어 자음체계와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한분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문장 "暹  ㏛抑 (한글 음역: 아도나이 에하드)'를 이룬다.  그러므로 찌찌틀를 보는 사람마다  신명기 6:4의 쉐마  를 연상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지켜야할 계명의 총합이 육백십삼 개라고 믿어왔다.  놀랍게도 찌찌트는 유대인 계명의 총합 613울 상징한다.   어떻게 그런가 보자.  찌찌트란 히브리어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풀면 600이란 아라비아 숫자에 상응한다.  그림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찌찌트는 여덟 개의 줄과 다섯 개의 겹 매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숫자를 모두 더하면 육백십삼이 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찌찌트를 보거나 착용할 때 그들이 지켜야할 육백십삼 개의 계명을 생각한다.   찌찌트는 탈릿에만 다는 것이 아니다. 

탈릿에는 물론이요 평상복에도 달도록 되어있다.  예루살렘이나 뉴욕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에게서 쉽게 찌찌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양복 하단을 살펴보라.  어김없이 늘어뜨린 술이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모두가 찌찌트이다. 



찌찌트의 목적

  민수기 15: 37-41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찌찌트를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위의 말씀에 근거하여 세가지 목적으로 찌찌트를 탈릿이나 상의 하단에 부착한다고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기 위함이요, 셋째로 거룩하게 살기 위함이다.  

찌찌트는 유대인의 삶에 깊히 밀착되어 있다.  누구든지 웃도리를 입지 않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웃도리를 입으면 웃도리에 달린 찌찌트도 함께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가는 곳에 찌찌트도 함께 간다.  그가 어느 곳에 있건간에 자기 옷단에 달린 찌찌트를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계약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기억하게되고, 하나님의 계명울 행하게 되고 결국은 거룩한 삶을 살게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남의 계명을 기억하며 거룩하게 살기 원하는 유대인의 바람은 찌찌트에 관한 그들의 규정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낮에는 반드시 찌찌트가 달린 옷을 입어야하며  기도할 때는 반드시 찌찌트가 달린 탈릿(기도보)을 두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탈릿을 입는 법

기도하기 전에 유대인은 먼저 탈릿을 머리로 부터 어깨에 두른다.  진실하게 온전히 하나님께만 전심으로 기도하기를 소원하는 유대인의 소원은 탈릿을 입으며 기도를 준비하는 유대인의 모습에 잘 나타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탈릿을 두르기 전에 먼저 시편 104:1-2을 음송하며 그 의미를 묵상한다.  묵상이 끝난 후 탈릿을 손에 들고 다음과 같이 음송한다.  "엄위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하나되게 하기위하여, 복되도다 하나님의 임재여! ㏛ 의 하나님과  ? 의 하나님을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나는 찌찌트가 달린 탈릿으로 나 자신을 감쌉니다.  내 영혼과 248 개의 나의 뼈 마디와 365 개의 나의 혈관이 613 계명의 상징인 찌찌트의 빛으로 감싸입니다. " 이와 같이 음송함으로서 유대인들은 온몸과 온 맘으로 기도를 준비한다.  그의 모든 뼈 마디가, 모든 혈관이, 하나님에게 집중된다. 

탈릿을 두르기전 탈릿을 앞으로 활짝 펼치며 다음과 같이 음송한다.  "복되신 이여, 주되신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우주의 왕이시여, 당신의 계명으로 우리를 성별하신이여,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우리를 (탈릿의) 찌찌트로 감싸라 하시나이다."  이 때 기도자는 자신의 온 몸이 계명으로 보호되는 순간을 기대하게 된다. 어떤 유대인들은 이때 탈릿의 꼭대기 부분에 입을 맞추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다음 탈릿을 뒤로 돌려 머리부터 덮어 씌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탈릿을 두르는 자가 완전히 탈릿으로 감싸여 외부로 부터 차단되며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도자는 다음과 같이 음송한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친절이 얼마나 귀하신지요.  사람이 당신의 날개 아래서만 피난처를 구할 수 있나이다.  그가 당신의 전에서 기름진 것으로 충족되며 당신의 기쁨으로 음료를 삼나이다.  당신과 함께함이 생명의 샘이요 당신의 빛 안에서만 우리가 볼 수 있나이다.  당신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친절을 베푸시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의를 보여주옵소서."  이와같이 음송한 후 비로서 탈릿을 어깨에 두르고 온몸을 감싼다.  



예배시 착용하는 탈릿

유대인들은 아침예배(샤하릿)나 추가예배 (무싸프)에 탈릿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통 오후에배(민하)에는 인도자만 탈릿을 입는다.  어떤이들은 샤밧(안식일)의 저녁예배나 그 밖의 절기 예배에도 탈릿을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예배드릴 때 항상 쉐마를 낭송한다.  쉐마 낭송 전에는 반드시 기도 순서가 있다.  이때 모든 기도자는 찌찌트의 술을 하나로 모아 한 손가락에 감싸 쥔다.  이는 지구의 네 모퉁이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상징하며 기도자는 다음과 같이 낭송한다, "축복과 평화를 신속하고 빠르게 지구의 네 모퉁이로부터 우리에게 허락하옵소서."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대로 찌찌트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쉐마의 선포를 상징한다.  이 찌찌트의 술을 하나로 모아 쥐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쉐마를 낭송할 때 찌찌트가 언급될 때마다 찌찌트에 입을 맞추는 전통이 있다.  어떤 유대인들은 찌찌트란 단어가 음송될 때마다 네번 씩 입을 맞추는데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네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쉐마의 마지막 문구를 낭송할 때 모든 회중은 자기의 찌찌트에 네번 입을 맞춘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 계명을 지키며 살겠다는 믿음의 표시이다. 





...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 가면 탈릿을 머리부터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몸을 앞 뒤로 흔드는 이유는 온 몸으로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서이다.  어떤이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며, 어떤이는 소리를 지르며, 어떤이는 속삭인다.  공통점이 있다면 누가 와서 소리를 질러도 모를 정도로 기도에 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이유일까?  탈릿때문이다.  탈릿을 머리에 쓸때 기도자는 외부의 세계와 차단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다.  작은 보자기에 불과한 탈릿, 그러나 탈릿을 머리에 두를 때 탈릿 안에선 전혀 새로운 세개가 열린다.  탈릿 안의 세계, 이는 하나님을 만나는 세계이다.        

외식뿐인 찌찌트를 비판하신 예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5에서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찌찌트를 크게 만들어 달고 다니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본문의 경문이라고 번역된 것은 유대인들이 기도시 부착하는 성구함을 가리킨다.  옷술은 찌찌트를 가리킨다 .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모양만 있고 내용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기도 생활을 비판하셨다.  탈릿과 트찌찢은 하나님 앞에 준비된 심령을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탈릿을 사용한 목적은 외부로 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찌찌트를 사용한 목적은 온 몸과 마음을 한 분이신 하나님께만  바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할 때에 문제가 생겼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니 다른 사람의 것보다 크게 또는 길게 만들 필요가 생겼다.  최선을 다한 노력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할 때에 예수님의 비판을 면할 길이 없었다.  과연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우리의 기도생활엔 유대인의 탈릿과 찌찌트를 능가하는 영적인 준비가 있는가?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유대인의 탈릿과 찌찌트를 능가하는 준비된 심령이다.


츌처: http://blog.naver.com/achilee/22595804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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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31. 01:19

⑴ 메주자Mezuzah  

메주자란 히브리어로 <문설주>를 뜻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집 문설주나 대문에 붙여놓은 조그만 상자를 말한다.

이 상자 안에는 모세 오경 중 하나인 신명기 6,4-9와 11,13-21의 구절이 적힌 양피지가 들어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Shema Israel>로 시작되는 이 구절은 야웨가 이스라엘에 내린 절대적인 명령을 담고 있다. 이 성경귀절은 정결하게 처리된 양의 가죽에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만이 필사할 수 있다. 이는 메주자가 신성한 것이기에 사소한 실수도 용납될 수없다는 것을 뜻한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웨이시다. 야웨 한 분뿐이시다. 마음으 다 가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그 힘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웨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메주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대인이 거주하는 집의 모든 문에 붙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메주자는 방으로 들어가는 문설주 오른쪽 위쪽 10㎝ 지점에 위치한다. 소수의 유대인들은 메주자의 위쪽이 방쪽을 향하게 약간 기울여 붙이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수직으로 붙이고 있다. 붙이는 방식의 차이는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가문의 관습에 의한 것이다. 
 

 
모든 집안의 문에 붙이는 메주자는 침실이나 욕실, 채광문이나 작은 방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방문에는 붙이지 않는다.

메주자를 붙일 때는 <브로카brocha>라는 축복의 기도를 하는데 이 기도는 메주자를 붙이도록 명령한 주님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잇다. 메주자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유대인의 성인식인 <바 미츠바bar mitzvah>를 거행한 13세 이상의 남자로 한정한다.

특별한 방법으로 기록된 메주자는 때때로 시간이 흐르면서 파손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안에 넣어둔 양피지의 글자 가운데 작은 흠집이라도 나면 메주자의 효력은 상실된다. 이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보통 7년에 두 번정도 메주자를 필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검사를 한다.

메주자에는 신성함이 주어지기 때문에 야웨에 대한 유대인들의 서약이 상징되어 있다. 따라서 문을 드나들 때 메주자에 입을 맞추는 것이 관행이다. 


 
⑵ 테필린Tefillin

유대인들은 기도를 할 때 토라의 구절이 적힌 작은 가죽주머니를 두 팔과 이마에 묶는데 이것을 테필린이라고 부른다. 테필린은 보통 <성구함聖句函>으로 번역되는데 본래의 의미는 <부적>이란 뜻이다.

 

 

어원에서 보듯 테필린은 무엇인가로부터 혹은 무엇인가를 보호하기 위한 부적으로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테필린의 어원은 기도한다는 테필라tefilah와 재판한다는 페 라메드לפ의 어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테필린 역시 메주자와 같이 신의 절대적인 명령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테필린의 착용에 관한 근거는 신명기 6,4-7에 나와 있다. 유대인들은 주일 아침(유대의 주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이다)에 기도하기 위해 토라의 구절이 담겨있는 성구함을 팔뚝에 잡아매고 팔에서 손에 이르는 곳에 가죽끈을 둘러 매었다. 그리고 다른 성구함은 이마에 비끌어 매고 어깨쪽으로 가죽끈을 내려 묶었다. 이 테필린은 아침 기도가 끝나면 풀었다.

위의 그림은 테필린을 착요하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아쉬케나지-유럽출신의 유대인-와 세파르딤-중동 및 북아프리카 출신의 유대인-의 착용방식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형식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⑶ 지지트Zizit와 탈리스Talis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기도할 때 머리에 숄Talis을 쓰라고 명하고 있다. 이 숄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네 귀퉁이에는 장식Zizit를 달도록 하고 있다. 이 숄의 착용은 민수기 15,37-41과 신명기 22,12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옷자락에 술을 달고 그 술에 자주빛 끈을 달아 이것을 볼 때 마다 야웨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네 귀퉁이에 달려있는 각각의 술 장식은 모두 39번을 감아 올렸는데 이는 히브리어 <주님은 한분이시다>라는 글자의 숫자와 같은 것이다.

구약에서 탈리스는 유대인의 정신과 영혼, 즐거움과 슬픔, 기도와 축제를 감싸는 종교적 상징으로 나타난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탈리스를 할례식,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에 사용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인 토라를 이동할 때 탈리스로 감싼다. 장례식에서는 시신을 감싸 매장하는데 탈리스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를 이 탈리스로 감싼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희. 노. 애. 락에 다양하게 사용하는 탈리스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할 때 자신들의 국기를 만드는데도 영감靈感을 제공하였다. 갓 건국한 이스라엘은 세계각국에서 온 이민 유대인들을 하나의 국가속으로 묶기 위해 탈리스에 다윗의 별을 첨가하여 국기를 만들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이스라엘 국기의 바탕은 탈리스이다.
   

 

탈리스는 텐트를 의미하는 탈tal과 작다는 뜻의 이트ith가 결합된 것으로 원뜻은 작은 텐트를 의미한다.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모두 자신의 탈리스를 가지고 있다. 이 탈리스는 신약성서에도 잠깐 언급되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이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직업을 <텐트 제조자>로 언급하는데 이는 커다란 텐트가 아니라 탈리스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장인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탈리스와 유사한 것으로 판초처럼 셔츠 위에 입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이를 <탈리트 카탄Talis Katan>이라고 부른다. 유대인이 탈리스 카탄을 착용하였을 때는 술 장식인 지지트가 옷 밖으로 보여야만 한다.

 


⑷ 메노라Menorah


유대인들의 믿음 상징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 가운데 하나가 메노라이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일곱 갈래 가지 형태의 촛불인 메노라는 매일 저녁과 아침(유대인의 하루 시작은 해질 무렵부터이다)에 성직자에 의해 심지가 교체되고 신선한 올리브 기름이 담겨졌다.

이 메노라를 제조하는 방식은 모세 오경 가운데 하나인 출애급기 25,31-40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어라. 한 덩이를 두드려서 밑둥아리와 원대를 만들고, 또 두드려서 꽃받침과 꽃잎 모양을 갖춘 잔들이 뻗어 나게 하여라. 원대 양쪽에서 곁가지 여섯 개가 나오게 하되 등잔대 한 쪽에 곁가지가 세 개, 또 다른 한 쪽에도 곁가지 세 개가 나오게 하라. 한 쪽 가지에는 감복숭아 꽃받침과 꽃잎 모양을 갖춘 잔 세 개, 또 다른 쪽 가지에도 감복숭아 꽃받침과 꽃잎 모양을 갖춘 잔 세 개가 뻗어 나게 하여라 . 등잔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모두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등잔대 원대에는 감복숭아 꽃받침과 꽃잎 모양을 갖춘 잔 네 개를 만들어라...이 꽃받침이 있는 곁가지들은 등잔대를 늘여서 만들되, 모두 한 덩어리의 순금을 두드려서 만들어라. 그리고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 앞을 환히 비추도록 등잔대에 올려 놓아라. 등잔 불집게와 불똥 받는 접시도 순금으로 만들어라. 이렇게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만드는데 순금 한 달란트를 들여 산 위에서 너에게 보여준 모양대로 만들어라.>

이 메노라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대로 <만국의 빛>이 되기 위해 이스라엘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유대인 회당인 시나고그에서 사용되는 램프는 <네르 타미드Ner Tamid>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계속 타오르는 불꼬>이란 뜻이지만 <영원한 불꽃>으로 번역된다.

메노라는 일반적으로 일곱 갈래 가지 이지만 유대인들의 가장 큰 축제인 <하누카Chanukkah> 때에는 아홉 갈래 가지 촛대를 사용한다.

  
  
    
⑸ 하이Chai

히브리어로 삶을 뜻하는 하이Chai는 목걸이나 다른 보석 장신구에 이용되고 있다.

 

 

하이는 히브리어 헤트ח와 요드י 두 글자를 합성한 것으로 신에게 삶을 의탁한다는 의미가 있다.

종교로서 유다이즘은 삶의 초점이 대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하이는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기쁨의 건배를 나눌 때 외치는 구호는 삶을 뜻하는 르하임l'chayim이다. 또 유대인들이 자선의 선물을 줄 때에는 글자 하이가 가지고 있는 수자인 18의 배수로 주어야 한다(ח는8,י는 10).

 


⑹ 야믈케Yarmulke(혹은 키파Kippah)

야믈케라는 말은 이디쉬어 얌미카Yammica에서 온 말이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이 말은 타타르족의 언어로부터 차용한 것인데 <테두리 없는 모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소수의 정통파 신자나 하시딤파들은 이 단어가 아람어 <예라이 말카yerai malka>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왕에 대한 존경 혹은 두려움>이란 의미이다.

이 테두리 없는 모자를 히브리어에서는 키파라고 부른다.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은 기도를 하기 전에 자신들의 머리를 덮었다. 이는 머리를 덮음으로서 신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아마도 고대 유대인들이 접하던 동방문명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동방민족들이기도를할 때 머리에 모자를 쓰는 것을 히브리인들은 신에 대한 존경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유습은 고대 로마에서도 있었다.즉 노예들은 자유민이 아닌 동안에는 그들의 머리를 가리게 하였다. 이런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머리를 가린 것은 자신들이 <신의 종>임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세시대에 와서도 유대인들은 항상 자신들의 머리를 가렸는데 이는 자신들의 위에 언제나 신이 존재함을 느끼고자 함이엇다. 이러한 전통과 관습은 유대인의 한 전형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위의 그림은 기도하는 유대인의 그림으로 성구함을 머리에 매고, 테필린을 팔에 두른 다음 지지트를 어깨에 덮고 야믈케를 머리에 쓰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이면서 유대인의 한 전형으로 보여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⑺ 하메쉬 핸드(Hamesh Hand) 

하메쉬 핸드 혹은 함사 핸드hamsa hand는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보석의 장신구의 소재로 많이 사용된다.

 

 

유대인들이 경영하는 어떤 보석가계를 가더라도 손가락에 분홍빛 점이 찍힌 거꾸로된 손을 볼 수 있다. 이 디자인의 변형으로 손바닥 중앙에 눈이 있거나 다양한 히브리 문자가 있는 것이 있다.

종종 이 문양이 아랍 문화권에서 유래한 <파티마의 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하메쉬 핸드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배타적이지는 않다.

왜 이 문양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상징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문명권에서 손이 악의 눈길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반적인 상징이라는 점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⑻ 다윗의 별

다윗의 별 혹은 다윗의 방패로 알려진 이 문장은 유다이즘을 상징한다.

 

 

이 문양은 다윗 왕의 방패 모양을 상징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다.

이 문양은 이스라엘 초기 랍비 문학이나 공예품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잇다. 그러므로 고고학적으로 이런 문양이 초기 공예품에서 발견된다면 모조품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이 문양이 유다이즘의 상징이 되는데는 프란츠 로젠바이크Franz Rosenzweig가 크게 기여하였다. 로젠바이크는 위쪽으로 향한 삼각형은 ‘신을 향한 상승의 투쟁’이며, 아래쪽으로 향한 삼각형은 ‘현실세계를 향한 하강적 투쟁’이고, 삼각형의 세 변은 이스라엘의 세 축인 코하님kohanim(사제), 레위족,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이론들은 신학적으로는 흥미롭지만 역사적인 사실성은 희박하다.

우리들은 이 다윗의 별이 오래 전부터 유대인의 상징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까지 유대인들은 메노라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 다윗의 별이 유대인의 상징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중세와 나치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세시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표시로 항상 다윗의 별만을 부착하였던 것은 아니다. 다윗의 별이 고정적으로 유대인의 표시가 된 것은 17세기 이후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부터 기독교인들의 집에 십자가가 달려있듯 유대인의 집과 회당에는 다윗의 별이 부착되기 시작하였는데 왜 다른 유대인의 상징을 놔두고 이것이 채택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다윗의 별은 1897년 시온주의의 문장으로 채택됨으로서 유다이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 내에서도 이 상징은 수 년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국기를 제정하는데 다윗의 별은 토른을 거쳐 국기에 삽입되었다. 이후 다윗의 별은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을 상징하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문양은 국제 적십자사에 의해 적십자赤十字(기독교 지역), 적신월赤新月(이슬람 지역)과 함께 붉은 다윗의 별로 동등하게 사용되고 있다.


출처: http://dohyosae.egloos.com/3048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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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30. 22:46

이스라엘에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그 내용가운데 기도가 필요한 부분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지난번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던 무기를 실은 배가 이스라엘 경찰에 발각된
사건과 이집트에서 가자지구로 뚫은 동굴을 통해서 무기가 지속적으로
밀반입되던 것이 발각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타냐후가 그 동굴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가자지구 내의
하마스가 더 업그레이드된 로켓포로 브엘세바와 아스글론을 공격했구요.
다만 이번 하마스의 공격으로 브엘세바 이남 10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의
발이 묶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브엘세바 이남의 모든
유대인 어린학생들이 학교에 등교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타냐후가 다시 하마스 주요시설과 민간인에 대한 보복공격을 해서
제가 알기로는 가자지구에서 8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폭탄테러는
그에 대한 보복공격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전면공격과 하마스의 보복공격이
계속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오늘도 여전히

그 땅에서 일어나는 보복공격과 테러의 정황들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며
간구합니다. 더 이상 무고한 피가 흘려지지 않도록 샬롬이신 주님의 팔로
안위하여 주옵소서.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행을
멈추게 하시고, 그 땅에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는 거룩한 주의 신부들이
준비되게 하시고, 또한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많은 자들의 마음을
깨우사 기도의 거룩한 성이 중건되게 하옵소서.


출처: 모퉁이돌 선교회 http://www.cornerstone.or.kr/public/readArticle.asp?ArticleID=A3026071037083934&CurrentCatID=C19595796428944581



 

posted by isaiah_43 2011. 3. 30. 13:13


 

박성업 선교사님/2011.3.29 화 / 새노래교회 화요회개 중보 

출처: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543699







 

posted by isaiah_43 2011. 3. 30. 03:54

 집회일정: 2011년 4월 5일 (화) 오후 2시, 저녁 7시 /
                               6일 (수) 오전 10시~오후 5시
/강사: 다비드리 선교사
/장소: 포도나무교회
            (7호선 학동역 5번 출구, 직진 두 블럭 지나서, 장수돌침대 끼고 좌회전, 직진 혜인 세라믹 좌회전)



 

posted by isaiah_43 2011. 3. 30. 03:44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주님은 15-16절에서와 본 장 말미에까지 한 가지 큰 원리, 한 가지 큰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단 한 가지, 좁은 문으로 들어감의 중요성과 우리가 참으로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가를 확실히 할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13-14절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말씀에 대한 일종의 강화인 것입니다. 13-14절에서는 초대 또는 권면의 형식으로, 우리가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계속해서 걸어 가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것을 정교화(精巧化)하여 세부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주쳐 오는 위험과 장애와 방해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내 중요한 이 원리, 즉 복음은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끝나거나, 찬양을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적용되어야 할 것임을 계속 강조하고 계십니다. 야고보가 표현한 대로, 저 완전한 율법의 거울을 끈기 있게 바라보고 그것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기는 대신,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우리가 본 바를 즉시 잊어버리는 것에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산상설교 말미까지 줄곧 강조하신 주제입니다. 우선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마주쳐 오는 두 가지 특정 위험의 형태로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이 위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이 위험들을 알아본 후에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처리하시고 나서 주님은 논증의 끝을 맺으시며, 두 집(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의 관점에서 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이며,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진실로 나타내시고 산상설교를 끝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주제요, 포괄적 진술 속에 들어 있는 공통점은, 심판의 사실에 관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을 일관하는 주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일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난제와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너무나 일반화된 경박하고 피상적인 복음전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 대다수에게 있어 성결과 성화된 삶이 부족함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위에 계심과 우리 모두 최후 심판의 방향으로 착실하고 확실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것을 계속 반복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이것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긴 하셨지만, 내내 심판의 사실과 심판의 성격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피상적인 검토나 단순히 외부적인 것들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요, 마음을 탐사하고 전 성품을 검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은 심판의 최종성과 심판에 이어올 결과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미 13절과 14절에서 어째서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인즉, 다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요, 이 멸망은 최종 심판 후에 불경건인에게 따라오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에 너무 심려하신 나머지 계속해서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 점은 다시 교사로서의 그분의 방법의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반복의 중요성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둔하며, 얼마나 더딘가를 아십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는데, 우리가 어떤 일을 안다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우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변함없이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원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가 어려운 것을 우리 모두 아는 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일들을 다시 상기시켜 주고 계신데, 무엇보다 두 특수경고를 우리 앞에 제시함으로서 그렇게 하십니다. 첫째 경고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우리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할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말하자면, 이 좁은 문 밖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설교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권면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 중입니다. 우리 주님은 결국 ‘자, 이 지점에서 너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 한 가지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위험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기에 항상 있다. 그들은 항상 저 좁은 문 바로 밖에 서 있다. 그곳이 그들이 애용하는 장소이다. 만일 그들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면 너희는 전적으로 파멸이다. 그들은 너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좁은 길을 걷지 못하게 설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하도록 너희를 단념시키려 애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그 특유의 교활한 유혹을 가지고 오는 거짓 선지자의 위험을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즉각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해석은 흥미와 매혹으로 가득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에 관한 본문을 놓고 교회사상 두 해석학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각 학파에는 교회사상 위대한 인물들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학파는 본문이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만을 언급하는 것이라 말하는 학파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열매는 교훈과 교리를 가리킨다. 열매는 오직 이것만을 가리킨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의미를 이것에만 제한시켜 풀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부류에 속하는 프로테스탄트 해석가들은 대체로 이것의 최고의 실례를 로마교회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는 이것과 전적으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이 부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 교훈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 사람들이 어떤 유의 삶을 사는가 하는, 순전히 ‘그들의 삶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 맥클라렌 박사와 같은 잘 알려진 해석가는 ‘본문은 이단들을 탐색해 내는 시금석이 아니요, 위선자들 특히 무의식적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겨내는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해석을 따르는 사람이 많거니와 그의 논증인즉, 본문은 교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온통 문제되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은 옳으나 그들의 생활은 잘못되어 있고, 자기네가 위선자들임을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해석학파가 있습니다. 본문에 대하여 그들의 상이한 두 가지 해석에 마주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둘 중 어느 해석을 믿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두 해석은 둘 다 옳은 동시에 둘 다 잘못되었으며, 잘못은 둘 중의 어느 한 해석이 바르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타협한다는 말이 아니요, 두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는 본문을 만족스럽게 해석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만 교훈이 문제요, 이단적 교훈만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단의 가르침을 탐색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분별력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단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강단에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설교를 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이적을 부인한다면, 여러분은 그가 이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어려울 것도, 미묘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묘사하신 말씀을 보면 이것에 어려움이 있고, 이것에 미묘한 것이 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주께서 양의 가죽을 묘사하실 때 사용하신 용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런 유의 거짓 선지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처음에는 그가 그런 자라고 결코 상상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암시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극히 미묘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에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나타냈는지 주목하실 것입니다. “이 자들은 이단을 가만히 몰래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른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아무도 거짓된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은 거짓 선지자의 이런 성격을 늘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험한 것은 실로 그의 미묘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바로 해석하려면 이 특정 요소를 참작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것을 이단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편 해석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에 어떤 극악 무도한 것이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행위로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미묘하지도 어렵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우리에게 오는 사람이요, 처음에는 바람직한 것을 모두 갖춘 외모로 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에 들고, 붙임성 있고 유쾌합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보이며,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대체로 아주 옳고 참된 기독교인 교사가 마땅히 사용해야 하고, 또 사용하는 용어들을 구사합니다. 하나님을 논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논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등,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할 말을 모두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방식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잘못된 곳이 있음을 여러분은 눈치채지 못합니다. 즉각 여러분의 주목을 끌거나 혐의를 일으키거나 눈에 거슬리게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으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이 사람은 가르침에서나 생활에서나 모두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뒤에 가서 보겠거니와 이 두 가지는 항상 불가분리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가르침과 생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잘못이 있는 곳에는 어느 점에선가 잘못된 생활 유형으로 인도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서술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가르침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대답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그 속에 ‘좁은 문’이, 그 속에 ‘좁은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런 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이며, 그 거짓됨은 그들이 ‘논하는 것’에 있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황의 미묘함을 자각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서 인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이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제외시키는 사람을 색출할 수 없노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고 냉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오란 크게 잘못된 것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라는 관념을 우리는 아무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옳은 것들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본문의 거짓 선지자들을 바로 이해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연인에게 거슬리는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는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보기에 너무나 매력적이요, 너무나 붙임성 있고,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그는 너무나 멋지고 기분 좋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모든 사람이 그를 좋게 말합니다. 그는 결코 설교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호되게 비판을 받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현대주의자들에게도 찬양을 받으며,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이른바 약방의 감초 격입니다. 그에게는 ’좁은 문‘이 없으며, 그의 메시지는 ‘좁은 길’이 없으며,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없습니다.

 


    이상이 거짓 선지자에 대한 대략적 서술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볼만합니다. ‘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설교에 거슬리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고 말입니다. 그 대답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후서 2장에서 어떻게 논증하고 있는가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민간(구약 이스라엘 백성)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2:1)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유형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항상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나 그와 같은 참 선지자가 올 때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거기 있어서 그를 문제삼고, 그를 적대하고 탄핵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무엇과 같았습니까? 그들에 대한 서술을 보기로 합시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가볍게, 피상적으로)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8:11). 거짓 선지자는 항상 매우 위로 적인, 기분 좋은 설교자입니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그는 여러분에게 항상 잘못된 것이 별로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그도 잘못이 약간은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잘못이 조금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만사가 괜찮으며 잘 되어 나갈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는 편협된 사람이요, 이단을 추적하는 사냥꾼이요, 그는 비협조적이다. 그의 말을 듣지 말아라. 모든 것이 잘 돼 나간다.’고 말합니다.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고치며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에 대한 무서운 진상으로써 놀랍게도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렘5:31)란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결코 불안케 하거나 언짢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과 같이 계속합니다. 여러분은 만사가 괜찮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나 이런 저런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이렇게 양의 가죽을 쓰고 있는 거짓 선지자는 항상 속 편하게 하며, 매우 안심을 줍니다. 그는 항상 악의가 없고 기분 좋고, 항상 변함없이 매혹적이어서 마음을 끄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냅니까? 전체로써 그 메시지에 교리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그의 메지시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 하나 상세히 열거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특수화하여 자세히 열거한다는 말은 무슨 소리이며,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어디서 들어갑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은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일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그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이 진리들을 믿지 않는다고 입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말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썽인 것은 그가 이것들을 조금도 말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 데 곧 사랑입니다. 그는 성경에 두드러진 기타 진리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는 분명히 잘못된 것들을 말하지 않으며, 분명히 옳고 참된 것들을 말하지 않고 피합니다. 그가 거짓 선지자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진리를 감추는 것은 철저한 이단을 전파하는 것만큼이나 괘심하고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를 ‘노략질하는 이리’의 결과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분 좋게 하고 붙임성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를 직면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최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입니다. 지난 50-60년 동안 최후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습니다. 지옥과 악한 자들의 ‘영원한 파멸’에 대한 설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베드로후서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후서의 정경성을 부정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장(章)은 성경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그토록 강하고, 그토록 폭발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거기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산상설교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양의 가죽을 입었으나 노략질하는 이리들인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그들을 썩고 악한 나무로 서술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설교했을 때(행24:24-25)와 꼭 같이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동시에 거짓 선지자의 교훈은, 죄의 사악성과 인간 스스로의 구원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실로 죄가 있음을 믿지도 않으며, 그 사악성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완전하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별적이거나 어떤 특정 죄에 대해서만 말할 뿐입니다. 그는 타락한 인생에 대해서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버림받고 부패했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전 인류가 죄의 연대책임을 지게 된 것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바 ‘죄의 사악성’(롬7:13)의 교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 철저히 무력하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말을 듣는 순수한 신자들이 그가 이런 것을 믿고 있는 것이라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 선생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는, ‘그들이 이런 것을 믿고 있는가?’입니다. 그 대답은 물론 ‘아니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것을 설교하며 가르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에는 보상적인 면이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도 ‘예수’에 대해서 말은 합니다. 그도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 죽음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떤 것인가? 십자가에 대한 견해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단적이며,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견해가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험하는 시금석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이것만이 죄를 위한 보상이요, 화해의 유일한 방법임을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대속물로서 거기 십자가에 달리신 것, 그가 ‘나무에 달리시므로’ 그의 죄책과 죄책에 대한 형벌을 떠맡으신 것을 그가 진정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죄를 처형하시지 않았다면, 존경하는 생각을 품고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이 그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함을 그가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3:25-26) 하실 수 있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심으로만 가능했던 것을 그가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대속적 속죄론인가? 하고 묻는 것이 거짓 선지자를 시험하는 방법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대해 말은 합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하며, 우리 주님에 대해 감상에 젖기는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의 거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의 십자가 설교는 “헬라인들에게 어리석음”이 아니요,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를 ’그의 철학을 통해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이로운 사랑의 철학으로, 무관심한 세상 때문에 애끓는 마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대하고 성스러운 계약으로 본 일이 없습니다. 이 계약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고, 우리의 죄를 아들에게 지우셨던 것입니다.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는 이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거짓된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회개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대수롭게 여길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결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무리들과 함께 달려나가고, 여러분의 이름이 기입되고 신문에 보도되는 많은 ‘결정’한 사람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나 요한 웨슬레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인물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습니다. 요한 번연은 그의 「은혜가 넘치다」란 책에서 자기가 18개월 간 회개의 고통을 당한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에는 이를 위한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회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고, 악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할 것과 지옥가게 되어 있는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죄라 불리는 이것이 여러분 속에 있음과 여러분이 그것을 제거하려 갈망하며, 어느 모양, 어느 형태로든 그것에 등을 돌릴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상을 버리되, 실제생활에서는 물론 생각과 전망으로도 세상을 버리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온 세상은 여러분을 바보라고 하거나 여러분이 종교광이 되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관없으며,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치료하며, 모두 괜찮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예수를 따르고, 또는 기독교인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은 길은 걸어가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산상설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비평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일어나서 심판을 선고하며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바리새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성결관에 집착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짓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죄들을 끄집어 내가지고 여러분이 이 죄들을 짓지 않는 한 모두 괜찮다고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오늘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성결은 서너 가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결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5-16)의 관점에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교회의 가장 큰 저주거리의 하나입니다. 거짓 가르침은 바리새적인 성결을 소원합니다. 거짓 가르침은 우리들 자신이 행하지 않기로 동의한 어떤 조목들의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조목들은 특별한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성결을 안이한 그 무엇으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넓은 길로 밀려들어가 넓은 길을 실천하려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오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의 일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의합니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훼방놓습니다. 자기 검토에 거의 이단이라는 느낌마저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를 바라봐야’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우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습니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휫필드나 웨슬레나 요나단 에드워즈뿐 아니라,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밤 열두 가지 질문을 자문해본 성도, 요한 플렛쳐와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자기 검토와 죄의 억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이한 구원이요, 안이한 기독교 생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지고 탄식하는 것은”(고후5:4)이라 말할 때의 기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바울이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마의 지배와 권력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것의 진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필요를 보지 못하는 것은 이 문제를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온통 안이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공격하는 이런 유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한 그를 형제로 여기고, 함께 교제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인즉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무섭게 쏘아보는 이 경고들이 신약성경에 들어있는 까닭은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려 온 바와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비판적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친절과 정중함을 성도다움으로 오인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인격이나 개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멸시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사실, 알렉산더 맥클라렌 박사가 그들이 무의식적 위선자들이라고 한말은 옳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붙임성 없고 유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대하기가 기분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을 위험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주님에 의하면 우리는 이것에 항상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는데도 거짓 선지자는 멸망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로 이것이 오늘의 교회상태라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교회가 어째서 이처럼 허약하고, 무능하며 무력해졌습니까? 그 원인은 지난 세기의 고등비평운동의 결과로 온 설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정죄 받은 설교인 것입니다. 그 옹호자들은 도덕과 일반적인 정신앙양을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설교의 실례를 문학과 시에서 끄집어 내왔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운운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운운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명백한 이단으로 인정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는 데 절대 중요한 기타의 사항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막연한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그들은 인기감식력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너무나도 많이 보고 있는 텅 빈 교회들과 저질의 기독교 생활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들 대다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입맛 떨어지고 불쾌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나는 정직히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이처럼 산상설교를 설교하기로 서약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말씀들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전에는 이것에 대해 설교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렇게 한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이 설교를 좋아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비위에 거슬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을 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심판과 멸망의 문맥 속에 집어넣으신 이는 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 이단 사냥꾼으로 알려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는 자기 형제들과 다른 모든 사람 위에 심판자로 앉아있는 괴짜요, 괴팍한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무릅쓰고, 정직하게 성경을 풀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멸의 영혼과 이 영원한 운명을 평가하고 값을 매길 때, 여러분은 하나님 존전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간곡히 권면하는 바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장21절)

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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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22:27

선한목자교회 / 2011년3월31일오후6:30-10시

출처: http://www.wmm119.co.kr/gmbbs/gmb_board_view.php?gmb_id=gmb_id_notice&page=1&no=370

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21:13


1월_복음기도모임
설교자 : 김용의 선교사 / 2011. 1. 25



진리의 다림줄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복음기도모임이 2011년 1월 27일(목) 오후 6시30분부터 10시까지 성남 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유기성) 6층에서 열렸다. 복음과 기도의 삶이 실제가 된 증인들이 삶의 고백으로 주님을 증언하는 시간에 1월 복음과 기도의 증인으로 박계환선교사(문화행동 아트리)가 증인으로 서게 되었다. 이 달의 메시지는 아모스 7장 본문 말씀으로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 대표)를 통해 선포되었다. 다음은 이 날의 메시지를 요약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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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아모스 7:7~9)

여로보암 2세. 가장 악한 왕이 가장 심판받을 짓만 골라서 하는데 얼마나 경제적으로 융성한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인생이 잘 풀린다? 성공한다? 인기 얻는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눈앞에 하나님 두려워함이 없는데 못할 짓이 무엇이 있겠는가? 마지막 말기 증상을 나타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거룩이 이 죄를 그냥 보실 수가 없다. 마지막 죄악의 꽃을 충만하게 피울 때, “서라! 지금 서라.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한다.” 라는 애절한 외침이 선포되어 졌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다림줄이 우리에게 내려질 때이다.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다림줄을 가지시고 이미 담 곁에 서 계신다.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는 것은 진리이다. 심판 날에 기준 되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심판 날의 운명을 우리가 선택하여 살 수 있다. 이 복음 따라! 진리 따라 살 것이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고 세상도 나에 대에 죽은, 예수 생명으로 살아가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복음의 사람들. 영원한 복음을 주셨기에 우리는 여기서 물러 설수가 없다.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내가 버티고 힘쓸 필요가 없다. 나는 실패해야 그분의 능력이 드러난다. 복음은 영원하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진리 앞에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는가?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사람이 환영하지 않는다. 분명히 둘로 딱 갈라진다. 말씀 자체가 심판을 한다. 

이때, 아모스의 말을 기억하라! 확실한 복음의 증인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할 수가 없다. 심판 날은 먼 훗날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준을 제시한다.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에는 다른 것 아닌 주님의 말씀이면 충분하다. 주님의 말씀이 결론이 되어 말씀하면 일어나고 멈춰서는 것. 그렇게 순종하면 주님이 행하실 것이다. 다림줄은 심판의 도구로도 사용되지만 한편 잘 세우는 기준으로도 사용된다. 우리의 교회가 정말 합당한가? 양보하지 아니하고 주님과 치열하게 진리와 함께 굳어진 군살을 뜯어내고 허물고 무너뜨리고 다윗의 장막을 세워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교회 안에 세워져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3:1) 

그런데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 공의, 심판보다 더 크신 주님의 긍휼이 호세아가 되어서 반역하여 떠나버린 고멜을 향한, 이스라엘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선포되어 지고 있다. 나 여호와는 그들을 사랑하나니 나는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 너는 못 한다. 내가 너를 통해서 내가 하리라!” “저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네가 갚아라. 얼마만큼 해야 되냐고 묻지 말라. 될 때 까지다!” 복음이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것은, 교회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것은 여러분은 포기했어도 여러분을 통해서 그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십자가 사랑이 나와 여러분을 이겼다. 순종하여 서게 하셨다. 이 땅에서 가장 불가능한 사람이 바로 나이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 몇 번 실패 했느냐?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님은 반드시 끝을 내실 것이다. 가능성을 보고 사랑하지 않았다. 그분의 운명이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3:5) 

새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과거를 지우시고 주님이 다시 과거를 기억도 못하시는 분처럼 신랑과 신부의 언약을 다시 맺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십자가가 있다. 주님은 우리를 호세아로 부르고 계신다. 복음을 받았으나 복음으로 살 결단을 못한 채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가장 순결한 신부로 우리가 언약을 할 것이다. 음녀처럼 떠나간 세상을 향해서 열방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선언하고 외칠 것입니다. 지금은 외식의 껍데기, 가면을 벗고 복음기도동맹이 되어서 함께 일어나 나아가야할 때입니다. 이때, 마지막 위기의 때에 거룩한 부름에 함께 서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갑시다!

출처: 순회선교단 http://www.wmm119.co.kr/gmbbs/gmb_board_view.php?gmb_id=gmb_id_eduroom&gno=1&page=1&no=135&search=&category_no=&menu1=&menu2=



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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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08:35

샬롬~

3월 월삭 집회에서 나누어드렸던 토라 포션 스케쥴표입니다.

매일 매일 토라를 읽고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데일리 토라 포션표의 숫자는 안식 후 첫째 날, 둘째 날...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첫째 날은 일요일, 둘째 날은 월요일, ... 다섯째 날은 목요일 입니다.

월요일과 목요일은 토라포션 전체를 읽습니다.
화요일에는 데일리 토라포션과 선지서를 읽습니다.
수요일에는 데일리 토라포션과 새언약을 읽습니다.
일요일과 금요일에는 데일리 토라포션을 읽습니다.
토요일 아침 기도 때는 토라포션, 선지서, 새언약을 읽습니다.
토요일 오후 기도 때는 다음 주 토라포션, 선지서, 새언약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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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08:26

3/17   fast of esther (에스더 금식)
3/20   부림절
3/21   수산부림
4/19 ~ 4/26  무교절(유월절, 초실절)
6/8 ~ 6/9     오순절
9/29   로쉬하샤나(나팔절)_5772년
10/8   욤키푸르(대속죄일)
10/13 ~ 10/20  초막절
10/20  쉐미니 에쩨레트
10/21  심카 토라
12/21 ~ 12/28  하누카


출처: http://cafe.daum.net/beithatorah/h7h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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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06:30

당신을 송축합니다.

아도나이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명령들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우리가 토라의 말씀들에 마음 빼앗기도록 명력하신 분이십니다.
아도나이 우리하나님, 토라의 말씀들이 우리의 입에,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의 입에,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가족의 입에 달콤하게 하소서.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과 당신의 백성의 자손들과 이스라엘의 집, 우리 모두 당신의 이름을 알게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토라를 그것의 그것의 목적을 위하여 공부하게 하소서.
바룩 아타 아도나이 토라를 그의 백성에게 가르치시는 분이시여.  

- BLESSINGS OF THE TORAH 중에서 -

 

 

토라포션은 토라(모세오경)을 일년에 한번 읽을 수 있도록 매 주간마다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하프타라와 신약성경 본문은 해당 토라포션과 관련이 있는 선지서와 신약성경의 본문을 의미합니다.

 

 

토라 포션

Traditional Parashah Table

#

Parashat

Torah

Haftarah

Brit Chadashah

1

Bereshit

1:1-6:8

42:5-43:11

1:1-14

2

Noach

6:9-11:32

54:1-55:5

24:36-46;
벧전 3:18-22

3

Lekh Lekha

12:1-17:27

40:27-41:16

4:1-25

4

Vayera

18:1-22:24

왕하 4:1-37

1:26-38; 24:36-53;
. 2:4-11

5

Chayei Sarah

23:1-25:18

왕상 1:1-31

1:1-17;
고전 15:50-57

6

Toldot

25:19-28:9

1:1-2:7

9:1-31

7

Vayetzei

28:10-32:3

12:13-14:10

1:19-51

8

Vayishlach

32:4-36:43

11:7-12:12
1:1-21

11:11-20;
26:36-46

9

Vayeshev

37:1-40:23

2:6-3:8

1:1-6, 16-25

10

Miketz

41:1-44:17

왕상 3:15-4:1

10:1-13

11

Vayigash

44:18-47:27

37:15-37:28

2:1-10

12

Vayechi

47:28-50:26

왕상 2:1-12

벧전 1:1-9

13

Shemot

1:1-6:1

27:6-28:13; 29:22-23

7:17-35;
고전 14:18-25

14

Va'era

6:2-9:35

28:25-29:21

9:14-33

15

Bo

10:1-13:16

46:13-46:28

22:7-30;
고전 11:20-34

16

Beshalach

13:17-17:16

4:4-5:31

6:15-71

17

Yitro

18:1-20:23

6:1-7:6; 9:5-9:6

5:8-20

18

Mishpatim

21:1-24:18

34:8-34:22; 33:25-26

5:38-42;17:1-11

19

Terumah

25:1-27:19

왕상 5:26-6:13

고후 9:1-15;
5:33-37

20

Tetzaveh

27:20-30:10

43:10-43:27

13:10-17

21

Ki Tisa

30:11-34:35

왕상 18:1-18:39

고후 3:1-18

22

Vayakhel *

35:1-38:20

왕상 7:40-7:50

고후 9:6-11;
고전 3:11-18

23

Pekudei

38:21-40:38

왕상 7:51-8:21

1:1-14

24

Vayikra

1:1-6:7[e]

43:21-44:23

10:1-18

25

Tzav

6:8-8:36

7:21-8:3; 9:22-23

7:24-8:6

26

Shmini

9:1-11:47

삼하 6:1-7:17

7:1-19; 8:1-6

27

Tazria *

12:1-13:59

왕하 4:42-5:19

6:8-13; 8:1-4

28

Metzora

14:1-15:33

왕하 7:3-7:20

8:1-17

29

Acharei Mot *

16:1-18:30

22:1-22:19

9:11-28

30

Kedoshim

19:1-20:27

9:7-9:15

고전 6:9-20;
벧전 1:13-16

31

Emor

21:1-24:23

44:15-44:31

벧전 2:4-10

32

Behar *

25:1-26:2

32:6-32:27

4:16-21

33

Bechukotai

26:3-27:34

16:19-17:14

. 21:33-46;
고후 6:14-18

34

Bemidbar

1:1-4:20

2:1-2:23

9:22-33;

35

Naso

4:21-7:89

13:2-13:25

21:17-26

36

Beha'alotekha

8:1-12:16

2:14-4:7

고전 10:6-13;
11:1-19

37

Shelach Lekha

13:1-15:41

2:1-2:24

3:7-4:1

38

Korach

16:1-18:32

삼상 11:14-12:22

13:1-7

39

Chukat *

19:1-22:1

11:1-33

9:11-28;
3:10-21

40

Balak

22:2-25:9

5:6-6:8

11:25-32

41

Pinchas

25:10-30:1

왕상 18:46-19:21

11:2-32

42

Mattot *

30:2-32:42

1:1-2:3

5:33-37

43

Masei

33:1-36:13

2:4-28; 3:4

4:1-12

44

Devarim

1:1-3:22

1:1-1:27

9:1-21;
딤전 3:1-7

45

Vaetchanan

3:23-7:11

40:1-40:26

23:31-39;
12:28-34

46

Eikev

7:12-11:25

49:14-51:3

11:8-13;
8:31-39

47

Re'eh

11:26-16:17

54:11-55:5

7:37-52; 1 4:1-6

48

Shoftim

16:18-21:9

51:12-52:12

1:19-27;
3:22-23

49

Ki Teitzei

21:10-25:19

54:1-54:10

5:27-30;
고전 5:1-5

50

Ki Tavo

26:1-29:8

60:1-60:22

1:3-6;
21:10-27

51

Nitzavim *

29:10-30:20

61:10-63:9

10:1-12

52

Vayeilech

31:1-31:30

55:6-56:8

10:14-18

53

Ha'azinu

32:1-32:52

삼하 22:1-51

10:14-11:12

54

Vezot Haberakhah

33:1-34:12

1:1-18

22:1-5

 

Additional Parashiot for Holidays

Parashat

Torah

Haftarah

Brit Chadashah

Rosh Hashanah
Day 1

21:1-34
29:1-6 (M)

삼상 1:1-2:10

살전 4:13-18;
고전 15:51-54

Rosh Hashanah
Day 2

22:1-24
29:1-6

31:1-19

살전 4:13-18;
고전 15:51-54

Shabbat Shuvah

32:1-32:52

14:1-9(h);
2:15-27;
7:18-20

10:14-11:12

Yom Kippur (shacharit)

16:1-34
29:7-11

57:14-58:14

3:21-26;
고후 5:10-21

Yom Kippur (minchah)

18:1-30

1:1-4:11;
7:18-20

3:21-26;
고후 5:10-21

Sukkot 1

22:26-23:44
29:12-16

14:1-21

1:10-14;
7:1-10; 21:1-4

Sukkot 2

22:26-23:44
29:12-16

왕상 8:2-21

1:10-14;
7:1-10; 21:1-4

Sukkot CH"M 1

29:17-22

1:10-14;
7:1-10; 21:1-4

Sukkot CH"M 2

29:20-25

1:10-14;
7:1-10; 21:1-4

Sukkot CH"M 3

29:23-28

1:10-14;
7:1-10; 21:1-4

Sukkot CH"M 4

29:26-31

1:10-14;
7:1-10; 21:1-4

Sukkot Shabbat

22:26-23:44;
29:12-29:16

14:1-21;
Ecclesiastes (K)

1:10-14;
7:1-10; 21:1-4

Sukkot Shabbat
CH"M

33:12-34:26

38:18-39:16;
Ecclesiastes (K)

7:37-44

Hoshana Rabbah

29:26-34

7:1-2, 37-44

Shemini Atzeret

14:22-16:17
29:35-30:1

왕상 8:54-9:1

17:1-9;
12:28-33

Simchat Torah

33:1-34:12
1:1-2:3
29:35-30:1

1:1-18

5:17-48;
7:21-25

Chanukah 1

7:1-17

9:1-7 10:22-39

Chanukah 2

7:18-29

9:1-7 10:22-39

Chanukah 3

7:24-35

9:1-7 10:22-39

Chanukah 4

7:30-41

9:1-7 10:22-39

Chanukah 5

7:36-47

9:1-7 10:22-39

Chanukah 6

7:42-47

9:1-7 10:22-39

Chanukah 7

7:48-59

9:1-7 10:22-39

Chanukah 8

7:54-8:4

9:1-7 10:22-39

Asarah B'Tevet

32:11-34:10

Tu B'Shevat

Ps 104:16-17; Psalms 120-134

7:13-24, 28-29

Shekalim

30:11-16

왕하 11:17-12:17

Ta'anit Esther

32:11-34:10

Esther (K)

6:16-18; 2:36-37

Zakhor (Purim)

25:17-19

삼상 15:1-34

Purim

17:8-16

Esther (K)

11

Parah

19:1-22

36:16-38

Ha-Chodesh

12:1-20

45:16-46:18

Shabbat Ha-Gadol

3:4-24

Passover Day 1

12:21-51
28:16-25

3:5-7; 5:2-6:1; 6:27

22:7-20; 1:29-31;
고전 15:20-28

Passover Day 2

22:26-23:44
28:16-25

왕하 23:1-9; 21-25

Passover CH"M 1

13:1-16;
28:19-25

Passover CH"M 2

22:24-23:19;
28:19-25

Passover CH"M 3

34:1-26;
28:19-25

Passover CH"M 4

9:1-14;
28:19-25

Passover (shabbat)

33:12-34:26
28:19-25

37:1-37:14
Song of Songs (K)

15:1-4

Passover Day 7

13:17-15:26
28:19-25

삼하 22:1-51

Passover Day 8

15:19-16:17
28:19-25

10:32-12:6

Firstfruits
(Habbikurim)

23:19;
26:1-11

15:1-4

Yom HaShoah

4:30-40

6:9-11

Yom Hazikaron

Yom Ha'atzmaut

11:8-21

10:32-11:12

24:29-44

Lag Ba'Omer

Yom Yerushalayim

Shavuot Day 1

19:1-20:23
28:26-31

1:1-28; 3:12;
Ruth (K)

1:32-34;
3:11-17;
2:1-21, 37-41

Shavuot Day 2

15:19-16:17

2:20-3:19

2:1-13

Tisha B'Av (shacharit)

4:25-40

8:13-9:23

3:11-17

Tisha B'Av
(Minchah)

32:11-14, 34:1-10

55:6-56:8;
Lam (K)

23:16-23;24:1-2

Rosh Chodesh
(weekday)

28:1-15

Rosh Chodesh
(shabbat)

28:9-15

66:1-24

 

Perek Yomi Tehillim

1

2

3

4

5

Day

Psalms

Day

Psalms

Day

Psalms

Day

Psalms

Day

Psalms

01

1-9

08

44-48

15

77-78

22

106-107

29*

140-144

02

10-17

09

49-54

16

79-82

23

108-112

30

145-150

03

18-22

10

55-59

17

83-87

24

113-118

 

 

04

23-2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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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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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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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8

19

90-9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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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35-38

13

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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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103

27

120-134

 

 

07

39-43

14

72-76

21

104-105

28

125-139

 

 

 

 


출처: 수캇다비드 - 이스라엘 24시기도의 집 http://cafe.daum.net/jerusalem24/PZkE/20






 


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04:28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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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saiah_43 2011. 3. 29.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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