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isaiah_43 2011. 10. 10. 10:19




posted by isaiah_43 2011. 10. 7. 07:29
북한성도들이여 탈출하라!

소련의 공산주의 통치를 받으며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보아왔습니다. 중국에서 수없이 감옥에 끌려들어가면서도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위해 가난을 택했고, 당원이 되는 것을 거부했으며, 공부 못하는 대신 복음을 택했습니다. 편리한 도시생활을 거부하고 산간오지의 불편한 삶을 택했으며, 어용교회를 거부하고 핍박이 따르는 가정교회를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당당하게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수용소와 감옥을 택했습니다.

북한에도 이러한 예수쟁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만난 후에 감옥에 가야 했었습니다.
그들은 저와의 만남 이후 행방불명되고 말았습니다.
수용소에 끌려가 죽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왜 잡혀갔을까요?
1995년 11월 14일 신의주 한 복판에서 55세의 한 사람이 처형됐습니다. 그는 1950년 6월 24일에 처형되어 순교하신 한 목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계신 곳에 나도 간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는 예수 때문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는 당국의 요구에 응하는 것을 거부하고 당당히 죽어갔습니다. 그러기에 피 흘리며 죽어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로 인해 많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 북한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까요?
1985년 모퉁이돌선교회가 북한선교를 시작했을 때,
유명한 신학자 한 분이 제게 “북한 선교? 하지마. 그냥 내버려둬.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복음 전하면 더 힘들어질텐데… 복음을 전하지 않는게 돕는거야!…” 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 말이 제 귀에서 들리는 듯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복음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북한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북한 성도들이여 탈출하라!
예수를 탄압하는 자들을 거부하라!
뛰어 나오라!
일어나 빛을 발하라!
히브리서는 믿음을 지키는 이들이 당한 순교적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에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할까요?
성경도 보내지 말고, 탈북자도 돕지 말고, 북한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하지 말고, 북한에 지하교회를 세우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 것을 알기에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제게 복음 때문에 매를 맞았으며 핍박을 당하는 북한성도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길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은 땅이었기에,
예수님이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기에,
저도 그 길을 가려는 것 뿐이었습니다.
저는 저들을 더 좋은 천국으로 이끌어 가려는 것 뿐입니다.
복음 때문에 죽어가는 성도들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주님이 십자가를 메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무익한 종


출처: http://www.cornerstone.or.kr/public/readArticle.asp?ArticleID=A3548590226399397&CurrentCatID=C19595796428944696

posted by isaiah_43 2011. 9. 21. 23:14



2011년 9월17일/밴쿠버 호산나 한인교회 집회 9번째 세션


위의 영상과 함꼐 꼭 꼭 확인해야 하는 진실들이 있다

혹시나 당신이
아래의 교단들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면
더더욱 주목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UL)
(LI)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LI)기독교대한감리회
(LI)한국기독교장로회
(LI)대한성공회
(LI)구세군 대한본영
(LI)기독교대한복음교회
(LI)한국정교회
(LI)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LI)(/UL)

대표적인 교회로 치면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이영훈 목사)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등등

한국에 내놓으라 하는 교단들과 큰 교회들이
무수히 가입되어 있는 NCCK라는 단체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대한민국과 북한의 수많은 영혼들을 속이며 지옥으로 끌고가는,
벼락을 맞을 사탄의 앞잡이 노릇하는 독사의 자식들은,
NCCK(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하는 분들과
NCCK에 속한 교회에 나가는 성도들은
이 사실들이 상당히 충격적일수 있다

따라서 위 영상의 말들과 아래의 글들이 진실인지 아닌지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정직한 영을 하나님께 구하며
예수님의 도움 아래 직접 리서치를 하길 바란다

어떤 교회와 단체들, 또 어떤 목사들이
이 단체에 가입되어 활동하는지 분명히 확인해서
당장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교회와 목사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만약 그들이 회개를 거부하고 이런 끔직한 사실들에 동의한다면
그들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박살내며 대적해야 한다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마귀의 거짓말을 토대로
종교통합운동(에큐메니칼)을 펼치고 있는 NCCK는
사탄의 앞잡이 들이며 예수를 배신한 독사의 새끼들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기도 왜 침묵하고 만 있나?)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4986 (기사 링크)

(아미타불 아멘은 나도 분노)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5934 (기사 링크)


NCCK에 가입되어 있는 교회와 목사들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잘 이해 할수 없는 단어들로
(에큐메니칼, 6.15선언, 10.4선언 등)
눈속임을 하며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신들뿐 아니라 성도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앞장서고 있다

아래 링크는 위키백과 사전이 정의하는 NCCK 이다

http://ko.wikipedia.org/wiki/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위 링크를 읽어 보면 NCCK는 예수님을 배신한채
종교통합운동을 앞장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들을 속이며
사탄이 만든 김정일 정권에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위 영상에서 보았듯이
북한의 교회 (조선그리스도연맹 / 조그련)인
봉수교회는 대놓고 예수를 부인하는 교회이다

(봉수교회의 정체에 대한 짧은 영상)
http://youtu.be/k4nCUyrCzls

하지만 NCCK는 주기적으로 조그련(가짜 북한 교회 연맹)과
봉수교회 등에서 모여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공식 기도문들을 발표한다
(NCCK 공식 홈페이지 자료실에 가면
이런 미친 기도문들을 언제든 다운받을수 있다)

NCCK는 기독교인들을 속이기 위해
무늬만 교회로 만든 가짜 교회인 북한의 봉수교회에
물품을 조달한다는 핑계로
하나님께 드려져야할 한국교회 성도들의 마음과 헌금을
김정일 정권에게 갖다 받치며
김정일 정권 유지에 이바지 하고 있다

6.15 선언과 10.4 선언은
`고려연방제`를 위한 준비 조항들로서
고려연방제는 `거짓평화`를 간판삼아 국민들을 속이고
남한의 지도자와 김정일이 일정기간을 번갈아 가며
한반도를 통치하자는 제도이다

김정일이 한반도를 통치한다….. 평화가 있겠는가??

NCCK는 사회 곳곳에서 기회가 되는대로
6.15선언과 10.4 선언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홍정길 목사가 설교한 2011년 8월15일 예배 기도문 전문)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8845 (기사 링크)

똑똑히 확인해 보았는가?

위의 것들 외에도 언제든지 NCCK가 공개적으로
이런 미친 사탄의 앞잡이 짓 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죽음의 영에 붙들린 사람들이
이 민족의 영적지도라고 여김받으니
이 민족은 어찌 되려는건가?

또한 굳이 NCCK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교단과 교회들이라 할지라도
지금 대한민국 대부분의 영적지도자들과 교회목사들은
죽음의 영에 극심하게 붙들려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놓은 양떼 들을
극단적 이기심과 죽음의 영에게 인계하고 있다

이대로 있으면 이 민족은 하나님의 큰 심판앞에
대다수가 지옥에 떨어질것이다

이런 영상과 글을 통해 나는 개인적으로
온갖 비방은 물론 죽음의 위협에 까지 놓일 것이다
하지만 제발 제발 한영혼이라도 진실을 깨닫고
죽음의 영에서 벗어나 예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 민족이 이런 죽음의 영의 기만에서 벗어나
생명과 빛 가운데 다시 거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괜찮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대놓고 전해주는데도
사실을 끝까지 보지않고 진실을 부인한 채로
죽음의 영에 계속 아멘하고 산다면
나중에 죽어 눈 떴을때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깨어나
영원토록 지옥 불에 볶아지며
이를 갈며 영원토록 후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제발 우리 민족은 죽음의 영에서 벗어나 예수께로 나아와야 한다

이대로 우리는 자멸하고 말것인가?
우리 민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 민족 가운데
이대로 심판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 만은 없다

기도하며 진실을 분명하게 확인한 후에
주변에 최대한 모든 사람에게 이 영상과 글을 전달하길 부탁드린다

또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 각자에게 원하시는
`넓은 자리`로 나아가서
어두운 데서 듣고 귀속으로 들은 것을 외쳐야 할때이다

제발 이 민족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만 온전히 통일되길 생명다해 바라며…



http://www.cyworld.com/upinspace
Facebook - up0124@hanmail.net
Twitter - up0124 


 
출처: http://www.youtube.com/

posted by isaiah_43 2011. 9. 19. 19:07

 
릭 라이딩스 기도요청
-중동의 정치상황에 관하여

안녕하세요 릭라이딩스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한 긴급기도요청을 가지고 왔습니다.
남은 9월과 다가오는 10월에 여러분께서 이 기도에 전심으로, 집중하여 동참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기도는 UN에 상정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인정안에 대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국가로 인정하는 것에 더불어,
지금 제 뒤로 보이는 예루살렘 동쪽편 반을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수도로 삼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 안의 위험성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정부 지도층과 손을 잡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붕괴를 위한 단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표명하는 단체입니다.
이것이 된다면, 여기 예루살렘은 곧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본거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 예루살렘, 이렇게 가까이에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점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 중에 저는 주님께서 열방에게 강력한 경고를 주고 있음을 믿습니다.

환상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열방들이 낮은 계곡을 넘어 뛰어 넘으려하고 있는데,
그 앞에는 구름과 혼돈,카오스, 경제적 위기로 가득찬 계곡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 있는 다른 봉우리의 꼭대기는 물댄동산 같은 것이 있는데
열방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결정점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투표를 하는 나라들은
그 봉우리를 넘게 될 것인데, 약간의 슬럼프를 넘으면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과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목적을 거스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편에 투표를 하는 나라들은
거기서 급속히 미끄러져 더욱 깊은 어둠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깊은 경제적 위기와 혼돈과 카오스, 폭동들의 계속입니다.
저는 모든 사악한 것들이 그 나라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는 모든 민족에게 중요한 때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요엘3:2에 나온 말씀과 일치합니다.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여호사밧 계곡은 성전산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계곡인데
바로 제 뒤에 보이는 곳입니다.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

그러므로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잠깐 이 영토분할 문제를 뒤로하고, 예루살렘 깃발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깃발을 펼침)
예루살렘 city flag입니다.
여기 보듯이, 실제 누구인지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슬픈 현실은, 이 도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이 도시의 반은 유다의 사자인데, 나머지 반은 초승달, 즉 이슬람 깃발의 심볼로 덮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도시가 반으로 갈려졌을 때 성공적이었던 경우가 없었습니다.
이 안은 많은 유혈사태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웨스트뱅크에 살고 있는 크리스챤 형제자매들에게도 위험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번 상정안은 가자와 웨스트뱅크를 모두 포함하는데,
말씀드렸다시피 가자지구는 현재 하마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크리스찬을 향한 핍박을 멈추게 하기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며,
더 많은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도 후윈 형제가 아내와 자녀를 남겨둔채 잔인하게 맞아 살해당했습니다.
최근에 웨스트뱅크에 있는 팔레스타인 목사님과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만약 이 안이 UN을 통과한다면,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이 웨스트뱅크에도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웨스트뱅크의 크리스찬에 대한 핍박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팔레스타인 크리스찬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대사를 보더라도 소련,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되었을 때, 유럽연맹은
그 나라들이 정치적 원칙을 표명하지 않는다면, 소수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무기 규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변 국가와의 평화를 유지하기로 결단하지 않는다면,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유럽국가들이 이제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해 공공연히, 그리고 지극히 적대적인 이슬람국가를 인정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보기도에 중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성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에게는 성경적 권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유대인들을 열방으로부터 다시 그 고토로 불러모은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 뒤로 보시는 예루살렘은 이미 3000년전 유대의 왕인 다윗에 의해 다스려졌었습니다.
장구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근대 영토법 상으로도, UN결의안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기 훨씬 이전인 1920년대에 리모결의안에서
이 땅이 유대인들의 돌아갈 고국땅이라고 천거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좋은 정보와 비디오들이 있는 웹페이지
www.givepeaceachance.info 로 가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때는 사단이 많은 중보기도자들을 공격하고 있는 때입니다.
제가 비전으로 본 것은, 파수대에 올라가 있는 한 중보기도자에게
한 사람, 이어서 또 한 사람 찾아와 정신을 산란시켜,
중보기도자가 적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루살렘과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사모하는 당신이
이 시즌에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않고
주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예루살렘을 위하여 집중적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시편33편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중동의 상황과 UN의 결정을 두고 이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10절부터 13절,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isaiah_43 2011. 9. 9. 09:59


새노래교회 회개기도모임 2011.9.6


posted by isaiah_43 2011. 9. 9. 09:54
posted by isaiah_43 2011. 9. 8. 23:36
















posted by isaiah_43 2011. 9. 8. 23:33















posted by isaiah_43 2011. 9. 8. 23:28


posted by isaiah_43 2011. 9. 8. 23:07



posted by isaiah_43 2011. 9. 1. 23:03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신사도 운동교회들의 회개에 대한 설교는 강하다. 그들은 자주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한다. 나는 신사도 운동이 뭔지도 몰랐을 때에 그들 몇 목사의 설교를 듣고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일단 회개라는 단어가 자주 설교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요즘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과연 일 년에 몇 번이나 등장할까? 한번 신경쓰고 들어보는 것도 약간의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에서는 회개라는 말은 깊은 산 속의 산삼같이 진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개독교인”이라는 말에 합당한 저질 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가 무우처럼 흔하지는 않더라도 산삼처럼 보기 드물지 않았더라면 개독교라는 단어가 쉽게 한국 사회에서 먹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는 떼를 지어 부지런히 다녔지만, 세상의 마음이 숙연해지게 하는 믿음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개독교라는 조롱하는 말이 쉽게 먹히고 말았다.

신사도운동 교회들의 강한 회개의 외침은 바로 이런 상황과 잘 맞았다. 마치 천상으로 호출되어 진노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곧 바로 세상에 보내어진 선지자의 일성으로 다가왔다. “교회만 다니면 다 구원 받습니까? 예수를 영접한다고 기도만 따라하면 다 구원 받습니까? 죄를 짓고도 아무 가책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 회개하세요! 회개하지 않으면 믿는 자도 지옥에 갑니다!”

그들 몇 목사들의 회개에 대한 설교는 확연하게 나와 다른 목사들의 설교와는 달랐다. 그래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설교를 들으며 나에게 부족하고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을 배우고 보충하려고 시간을 들였다. 그런데 조금 더 듣고 연구하니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세례요한 같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세례요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을 닮은 것 같기도 하였지만, 바울의 스타일은 더욱 아니었다. 별종의 회개 멧시지였다.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회개운동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믿는자들을 다 싸잡아서 저질이라며 욕을 보이는 부끄러운 개독시대를 살며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잘못되었나?”, “정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가?”라며 반성의 부담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메신저로 다가온 바로 그들이 알고보니 신사도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사도, 선지자들이었고, 아니면 그 주변에서 함께 얼쩡거리는 쟁쟁한 신사도운동가들이었다.  

<신사도운동의 회개는 십자가와 맞지 않다!>

회개에 대해서 제대로 바르게 전하기나 하면서 그런다면 좀 이상한 구석이 있을지라도 그냥 봐 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왜곡하면서 회개에 대한 강박관념만 가지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를 듣고 금새 그들의 회개 병에 동화된다.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 쉽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면서, 그런 이상한 회개의 열기를 전파하는 작고 이상한 선지자들로 변해버린다.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가 그 사람들과 점점 더 멀어지는 확실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사도운동가들이 전하는 회개의 가르침의 내용은 복음적이지 않고 율법적이다. 율법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내실 형벌을 예상하고서 그 형벌로부터 미리 벗어나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하게 만드는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이고, 신자가 회개하는 긍극적인 목적은 진노 아래 떨어지지 않고 현재의 행복과 번영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가들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할 때에 대부분 곧 임할 전쟁, 지진, 화산, 기근 등의 재앙에 관한 묵시가 동반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곧 그런 일들이 임한다고 한다.

2010년 6월에 검은 아프리카 사람 데이비드 오워(자칭 선지자)가 한국에 와서 한국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경고하신 예언이라면서 전했던 황당한 메시지가 그랬었다. 한국이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이 난다고 했다. 미사일이 날아들어 발전소가 터지고, 빌딩들이 무너지고 ... 어쩌면 핵이 터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무렵 주일 설교 시간에 아프리카 무당의 형편없는 개소리라고 말해 버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편으로 두려워했고, 심지어 많은 목사들까지 들어서 손해 될 일이 없다며 성도들에게 회개를 권유했었다. 회개라는 중요한 단어와 개념을 강조하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비해져야 한다고 하니 사실 여간 혼란스럽지가 않다.

그러나 그런 회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하라고하시는 바라시는 회개가 아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일까? 그런 말을 듣고 아무리 회개를 아무리 많이 해도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고 영혼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오래 회개기도를 해야 그 재앙이 철회된다는 것인가? 또 그 당시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다음에 다시 잘못하거나 죄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진노를 보내시지 않으실 것인가? 지금 회개한 것이 그때까지 유효할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는가? 율법적인 회개에 세뇌당하면 계속 이러한 진노와 회개의 쳇바퀴에 벗어날 수가 없다. 영원한 구원으로 인한 성도의 행복과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확실한 은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성도에게 주신 자유 등의 기독교 신앙의 중심 기둥들이 부러지고 만다. 그래서 사탄은 시시적절하게 이런 율법적인 회개사상을 퍼뜨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회개는 복음적 회개이다. 복음적인 회개의 원인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심판과 재앙이 아니고 이미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다. 심판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회개가 아니고, 십자가를 통하여 보내신 성령의 감동을 입어 변화된 마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회개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되고, 그 말씀에서 심히 벗어나 있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됨으로 회개하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가 많아지고 깊어 질수록 그 성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그 영혼이 더욱 행복하게 되고 자유하게 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복음적 회개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 15장 회개에 관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질과 의로우신 법에 반대되는 자기의 죄들의 위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더러움과 가증함에 대해서 보고 느낌으로, 그리고 회개하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음으로, 자기의 죄들을 매우 슬퍼하며 미워하며, 그 모든 것들로부터 들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와 그의 계명들의 모든 길들에서 그와 함께 걷기를 결심하며 노력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신사도운동가들의 회개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율법적이다. 외국의 신사도운동가들보다 이상하게 한국의 신사도운동가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피터 와그너나 다른 외국의 신사도운동가들이 노골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한국과 미국의 이민교회의 대표적인 신사도교회의 목회자들은 거침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간다고 설교하고 있다.  

그러한 회개 설교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회개가 하나의 구호가 되어 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 구호를 외치면서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 다른 곳으로 빠져 들어 간다는 사실은 더욱 심각한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어떤 교회로 옮기고 나더니 그렇게 변해가는 친구나 이웃을 보고서 걱정하고 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친구가 새로운 교회로 옮기고 난 후에부터 갑자기 회개에 대한 이야기 하고, 전쟁이니 지진이니 ... 그런 소리를 갑자기 자주 하고 있다면 걱정하시면 상담하는 매일을 주셨다. 그 교회의 홈페이지를 보니 세계도처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사고와 재해들에 대한 소식이 CNN 방송같이 빠르게 보도되고 있었다. 신사도운동 교회였다. 그런 것들이 모두 그들의 불순한 회개사상과 얽혀있는 것들이었다.

온전치 못한 연약한 양들을 지배하려는 술책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뭔가 다른 선지가적인 설교로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크고 작은 다양한 죄를 달고 사는 죄인들이며, 누가 강하게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이 찔리고 약간이라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충 아무에게나 조금만 분위기를 잡으면서 “당신의 죄가 다 드러났습니다!”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색이 달라진다. 오래 전에 영국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정치인 10여 명에게 아무런 보충설명을 달지 않고 아주 간단하게 “다 들통났습니다!”라는 짧은 문장의 전보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전보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조용히 잠수하여 한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죄를 항상 달고 산다. 성도들에게도 죄가 달려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오직 공동묘지에서 누워있는 자들에게만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마음이 더 순수하고 여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신사도운동의 회개에 속아서 함께 휩쓸리는 것이다.  

<죄에 대한 바른 태도가 참 믿음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는 믿음의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나야 한다. 믿음의 증거들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참 믿음의 증거는 죄에 대한 우리의 자세이다. 이전에 즐기던 죄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지적으로 친근하지 않아야 한다. 혹시 죄를 범하더라도 속히 하나님 앞에서 바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비성경적이다. 죄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해야 성경적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나는 성경을 제대로 아는 바른 목사라고 자부한다. 또한 목사이건 일반 성도이건 상관없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다시 죄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일평생 신실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사람이라고 칭창 받았던 다윗도 그만 쉽게 죄에 빠지고 말았다. 이웃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서 그만 죄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지도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왕의 권세로서 자신의 죄의 욕망을 쉽게 성취하여 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인은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장수의 아내였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다시 그 충성스러운 부하까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이용하여 죽이는 또 다른 악한 죄를 짓고 말았다.  

인간은 죄에 대해서 너무 연약하고 대책이 없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비웃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부분에서만, 그리고 그 당시에는 조금 낳을 수는 있을지라도 다른 심각한 죄에 대한 큰 구멍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음란의 유혹에는 비교적 강하나 돈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돈에는 비교적 강하나 또 다른 죄에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귀는 한 가지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공략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각 사람들의 특성에 맞게 맞추어서 공략한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면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2,3)

다윗이 그렇게 넘어지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다. 정말 실망스럽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죄에 빠지는 그 장면으로만 그의 믿음을 결론 내리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적을 받게 되자 다음과 같이 그의 더러운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토하였고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하게 구했다. 성경은 그 모습까지도 전체 속으로 포함시켰다. 바로 이 모습도 참 믿음을 가진 성도의 진짜 믿음의 증거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이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인간의 실존을 설명했다. 구원 받은 한 성도 속에 두 가지의 상반된 성향이 존재하면서 서로 심히 투쟁한다고 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육신의 속성을 여전히 죄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 안에 이 두 가지가 있다. 서로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두 힘이다. 우리 속에서 서로 대치하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두 속성의 싸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다. 어떤 세력이 더 자주 이기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질이 변한다. 우리의 믿음의 품격도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서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80년대에 영화 터미네이터의 주연배우로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주지사가 되었던 신체가 탁월한 유명한 사람이 있다. 그는 외모와 인기와 명성과 돈과 권력 등의 인생들이 사모하는 모든 것들을 갖추고 누린 사람이다. 그런데 그도 알고 보니 죄의 종이었다. 25년 동안 자기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와 아내 몰래 죄를 지으면서 아들까지 낳아서 기르고 있었다. 이제 그 죄가 드러나서 명예와 가정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육신을 지배하는 죄로 인해 평생 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또 한 사람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프랑스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이며 현재 IMF 총재인 분이 맨하탄의 호텔에서 방 청소를 하기 위해 들어온 호텔의 여직원에게 죄를 지으려다가 인생을 망쳤다.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간신히 감옥행은 피했지만, 무장경관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부끄럽게도 발에 전자발찌를 차야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나와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자리에 서지 않았지만, 본성이 같은 죄인들이다. 시장의 상인이나, 밭의 농부나, 청와대의 대통령이나, 대학의 교수나, 병원의 의사나, 군대의 장군이나 모두가 같은 죄인이다. 예외가 없다. 아무리 세계적인 사람들일지라도 죄의 힘과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초라한 죄인일 뿐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게 36:26).

죄를 이기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오직 성령만이 죄를 구별하고, 거부하고, 이기게 하신다. 인간이 가장 죄를 잘 대적하고 이기는 때는 성령의 지배와 다스리심을 충만하게 받는 상태, 성령충만한 때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이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시면 마음에 죄를 대적하고 싫어하는 새로운 성향이 생긴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마음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죄를 탐하는 마음이 경계하고 대적하는 마음으로 변한다. 우리의 전 인격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죄가 들어올 수 없다. 성령충만은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미 들어온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은혜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절대로 죄를 깨닫지 못하고, 죄에 대한 애통이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에 구두 속으로 모래가 한 두알 들어갈지라도 걷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데 왜 눈 속으로 들어가면 견디지를 못하는가? 감각의 차이이고 부드러움의 차이이다. 발바닥의 감각은 너무 무디고 두껍다. 그러나 눈은 너무 섬세하고 감각이 예민하다. 그래서 모래알 보다 작은 이물질이라도 들어오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발바닥의 피부와 감각이 그렇게 변하면 모래에 대해서 똑 같이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에서 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살아난다. 완악하고 딱딱했던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버린다. 그래서 사람을 여럿 해친 사형수도 성령이 임하면 울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회개는 성령이 그와 함께하시는 증거이다. 성령은 죄인들을 항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결케하시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죄가 못 들어오도록 막기 위해서 성령충만해야 하고, 들어온 죄를 깨끗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도 성령충만이 회복되어야 한다. 죄를 대적하는 자세와 죄를 범했을지라도 참되게 회개하는 자세는 그 사람의 믿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회개는 영적전쟁의 절대적 요소이다>

물론 그 누구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다 그렇지!”라고 하며 너무 쉽게 죄를 용인하지 말고 죽도록 싸워야 한다. 가장 큰 마지막 싸움은 항상 바로 자신의 죄와의 싸움이다. 우리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싸움이 최고의 전투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가장 중요한 전투를 승리로 마감하기 위한 절대적 요소이다.

회개 없이 영적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회개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 수 없다. 회개 없이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도 없다. 회개 없이는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도 없다. 회개 없이 죄를 부리며 다가오는 마귀를 이길 수도 없다. 회개와 영원히 담을 쌓은 것은 하나님과 담을 쌓는 것이다. 회개 없는 믿음은 결국 죽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자주 많이 회개해야 한다. 나도 충분히 강력하게 회개에 대해서 설교하는 목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말로 회개! 회개! 회개! 하면서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성경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목사와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사도운동 교회의 목사들의 회개 설교는 또 다른 심각한 골치이다. 회개를 이상하게 남발하면서 복음을 왜곡해 버린다. 그들은 “진짜 구원 받은 성도도 회개 안하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거침없이 설교한다. 얼핏 생각하면 나쁠 것이 없다. 가능한 죄를 짓지 않게 만들고, 죄에 빠지더라도 빨리 회개하도록 하니 좋은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좋은 회개라도 어디까지나 성경적이어야 한다. 울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게 울어야 애통이고 간구이고 기도이다. 회개를 어찌 하느냐에 따라 참된 회개일 수도 있고 사탄을 즐겁게하는 종교적인 회개일 수도 있다. 회개가 잘못되면 사탄적일 수도 있을까? 복음적 사고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가슴을 시리게하는 서글픈 사실이다. 혹시 쉬지 않고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하는 사람의 영혼 속에서 구주의 피 묻은 십자가가 점점 왜소해지다가 그만 사라지고 마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면 이제부터 신사도 운동하는 목사들의 구원과 회개에 관한 설교를 주의깊게 들어보기 바란다. 그 설교를 듣고 흥분하고 돌아오는 성도들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 뭔가 분명히 보일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 앞장서는 그들의 설교를 듣노라면 과연 영혼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지에 대해 의심이 일어난다. 구원은 내가 나 자신의 회개를 통해 힘들여 획득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통하여 껄떡거리면서 유지하고 보수해야 하는 인간의 힘겨운 노력의 결실이라고 여겨진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써야 했던 동일한 상황이 2,0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미국의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들에게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참된 회개의 빈자리를 다른 것들이 넉넉히 메우고 있다>

그런 이상한 회개를 전하는 그들은 모두 자신을 선지자나 사도라고 한다. 강력한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그들이 일반 목사도 아니고 더욱 위대한 사도와 선지자라고 하니 일반 성도들로서는 감히 대항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과 권세가 어떻게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지, 새로운 기독교 세계가 어떻게 열리고 있는지 ...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면 좋겠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라! 그들의 입에서 예수의 보혈의 위대한 능력과 권세가 과연 제대로 선포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바란다. 카랑카랑한 선지자 분위기 풍기는 음성으로 회개를 죽도록 외치기는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이 없다. 그들이 이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회개를 매우 강조하는 것도 일반 교회와는 다른 점이지만, 더 심각하게 다른 점은 구원의 영원한 보루인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별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들의 복음은 우리의 복음과 질적으로 다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을 통하여 마귀가 집요하게 벌이고 있는 배교라고 하는 연극이다.    

그 잘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창안하는 신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없거나 너무나 왜소해졌다. 십자가가 없어진 그 공간이 그들의 요상한 복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열심과 기도와 회개와 봉사와 충성과  순종과 찬양과 기적과 입신과 방언과 다른 많은 것이 들어선다.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화려해 진다.  그러면서 그들은 "전세계적으로 부흥하는 모든 교회들이 신사도운동을 추진하는 교회들이다!", "하나님은 신사도운동하는 종들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라며 자랑한다. 동시에 그들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부흥으로 홍보된다.

나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들의 이 거짓 부흥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빈번한 단기선교, 뜨겁고 감동적인 찬양, 특히 일어서서 손을 들고 찬양하거나 손춤을 주면서 찬양하는 사람들, 신비적인 기도 소리들, 자기들끼리의 뜨거운 결속, 그 지도자들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순종 ... 이것들이 부흥의 진정한 증거들일까?  

이 자체가 꼭 나쁜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부흥의 알맹이도 결코 아니다. 십자가의 권세와 능력을 힘써 선포하지 않으면서 이런 따끈따끈한 현상이 일어나고 유지된다면, 절대로 반길 일은 아니라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별난 회개의 복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면, 그것이 부흥이고 성령의 역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끝까지 구원을 간직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라고 주장한다!>

신사도운동가들의 회개의 복음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다. "믿는 사람들 중에서 결국 구원 받는 사람은 2%~15% 정도이다!"라고 거침없이 말해도 통한다. "입신하여 천국 상황을 보고 온 사람들의 간증을 종합하여 보고, 예언자들의 예언을 종합해 보니 그런 통계가 나옵니다"라고 오중직을 모조리 다 가지신 서울의 한 자칭사도가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그 인사의 회개복음에 은혜 받아서 십자가를 부여잡기 보다는 더 힘써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일이 어찌 사람으로 부터 왔겠는가? 어떤 영리한 인간이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 이름이 S로 시작되는 그 영리한 것과 그의 종들이 벌이는 일일 것이다.      
구원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그 은혜의 넓이와 깊이는 인간의 필설로는 형용할 수가 없다. 십자가에서 발원한 구원의 강의 깊이와 넓이는 너무나도 엄청나다. 그래서 "Amazing Grace"라는 찬양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찬양이다. 신사도운동의 별종의 회개를 전파하는 그 추한 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간다! 회개하라! 회개해야 한다!"라고 설파하면서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인 보혈이 흐르는 십자가를 떠나게 한다. 대신 부지런히 회개하자고 한다. 그들은 십자가를 뽑아 버리고 사람의 회개의 말뚝을 대신 그 자리에 세우려는 신 율법주의자들인 셈이다.  

<구원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구분하지 못한다!>

회개와 구원의 관계, 회개와 성화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도들은 그들의 간교한 설교에 속게 된다. 우리는 두 차원의 회개가 있다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없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로)돌아오라”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회개의 개념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31:06).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2:12).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간의 행위의 개념을 신약성경은 “회개”(메타노에오)라는 한 단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회개의 개념도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차원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구원(Salvation)을 위한 회개이고 또 하나는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한 회개이다.  

사도행전 초반에 나타난 사도들의 회개의 설교는 대부분 구원을 위한 회개를 다룬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회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다리를 통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니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곧 구원의 회개이다. 다른 길들과 다른 다리들을 향하여 걸어가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향하여 인생의 길과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구원의 회개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5:31)라고 선포했다. “임금과 구주”라고 했다. 더 이상 예수를 평범한 사형수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사회운동하다 실패하고 죽은 죄인이나, 나사렛 출신 저질 이단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죄와 사망에서 건지움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니 그길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 인격적으로 굴복하여 주인으로 영접하여 겸손하게 생명을 의탁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회개의 선포의 중심 내용이었다. 이 회개로 인하여 죄에 떨어져 실패한 에덴의 아담으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에덴의 아담이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도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도 바울도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라고 한 것이다.    

<회개를 언급하는 성경구절을 멋대로 도용할 뿐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에 빠진 그 목사들은 베드로의 이런 설교조차 바르게 해석하지 못한다. 전혀 엉뚱하게 제 멋대로 설교한다. “구원은 예수를 자기의 임금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가 임금인데, 어떻게 예수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임금이 싫어하는 일을 그대로 달고 살수가 있습니까? 임금이 싫어하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자기의 임금으로 삼은 사람이 예수가 싫어하는 죄를 그대로 둘 수 있습니까? 임금이라면서요? 그게 정말 예수 믿는 겁니까?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고, 목사라고 다 같은 목사가 아닙니다. 영혼을 죽이는 소경된 설교자들에게 영혼을 맡기지 마세요! 진짜로 구원 받은 사람일지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갑니다!”라고 거침없이 외친다.

참으로 살 떨리게 하는 강한 회개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는 베드로의 의도와는 전현 상관이 없는 설교이다. 베드로가 구원의 차원에서 언급한 회개를 그들은 성화와 영적성장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한다. 바로 여기서 복음의 중대한 변질이 일어난다. 구원을 위해 자기 지혜와 자기 노력을 버리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의탁할 것을 결단하는 구원의 회개와 영적성장과 더 깊은 성화로 나아가기 위한 성화의 회개를 혼탁하게 섞어서 외친다. 그러니 성도들이 구원과 회개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결국 그들의 구원이 시시때때로 출렁거리고 덜렁거리게 되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회개는 구원의 영속성을 훼손한다!>

더욱 중대한 사실은 그들의 설교에는 구원의 영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복음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 자신이 죄를 짓느냐 마느냐, 그리고 회개를 하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죄를 조심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에서 어떻게 건강한 성도가 태어나고, 자라고, 훈련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수시로 확실하게 구원 받은 성도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자주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서 외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하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5,6).

이 말씀으로 이미 구원 받은 성도의 구원의 박탈을 자신있게 말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이다. 사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구원에 지극히 합당한 삶을 풍성하게 가꾸어가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값없는 구원의 은혜와 풍성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을 다 알고 경험했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로서 그리스도를 다시 부인하면 비록 후에 회개할지라도 결코 이전과 같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신령한 관계를 얻을 수 없고, 그와 같은 믿음의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핍박이 거셀지라도 배교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라는 격려이며 동시에 경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상한 회개사상을 전파하는 신사도운동가들은 이런 중요한 말씀을 이미 얻은 성도의 구원의 박탈과 변개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본문으로 삼아 버린다. 그리고 은혜로 얻은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성도 자신의 역할의 지극히 중요하다는 근거로 삼는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니라”(요10:28).
“너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니라”( 요 10:29).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절대적 주권에 의한 성도의 구원의 영속성을 말하는 위의 말씀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가? 결국 그들의 가르침과 사상은 정확무오하고 우리의 신앙과 삶의 절대적인 절대적 기준이 되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사상과 운동이 마귀에게서 나왔다는 증거이다. 어떤 것이 아무리 근사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면 무조건 버려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도 진리일 수 있는 것은 우주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회개 설교로 영혼들이 시계추처럼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간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9)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이 우리의 신앙적인 행위와 신앙적인 선택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선물로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인간이 스스로 만들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 믿는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오래전에 택하셨고, 때가 되어 믿음 속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기대하시고 계시다. 인간의 그 어떤 조건에 근거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은 영혼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속하였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행위와 믿음에 구원의 유지가 달렸다면, 과연 처음 구원을 끝까지 유지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사람이 처음 구원 받고서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에 갈 때까지 시계추처럼 얼마나 자주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다가 마지막 한 곳에 안착하는 것일까? 신사도 운동의 복음은 우리 영혼을 이렇게 기구하고 불안스럽게 만든다.    

조금만 신경을 쓰고 들으면 그들의 설교에는 십자의 대속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하리만큼 그들은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지 않는다. 참 이상하게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회개의 외침은 Satanic하다. 십자가와 예수의 보혈이 없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아무리 예배와 기도와 찬양이 풍성해도 그런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교회가 아니다. 우리 구원과 구원의 영속성의 사유가 십자가와 보혈이라는 사실을 거의 강조하지 않는 목사들은 대부분 신사도운동에 미혹받아 진리에서 벗어난 그들이다.  

신사도 운동을 앞장서 전개하는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는 처음 예수를 믿는 단계에서부터 모든 죄를 회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이 들도록 설교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입장에 따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값없는 구원의 은혜, 오직 십자가를 부여잡는 믿음으로 인해 임하는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라는 구절을 그럴 듯하게 인용했다.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는 부분보다 “회개하고”라고 하는 부분이 앞서 있으니까 먼저 모든 죄악을 철저하게 회개한 후에 드디어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그때 구원이 임한다는 식이었다. 신사도 운동은 이렇게 복음을 왜곡한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그렇게 구원받았습니까? 아직 영혼이 죄 속에서 죽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은혜로 부어주시는 성령의 세례없이 어떻게 자기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과연 자기 죄의 몇 %의 회개해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갈 자격 생긴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끝가지 구원을 간수하여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더럽고 추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를 의지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아무 공로 없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합니다!”라며 진심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 받는다. 이것이 구원의 회개이다. 이 외의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작용하는 것은 없다. 다른 어떤 것도 추가할 인간의 것이 없다. 이것이 참 복음이고, 이것이 구원을 얻는 회개이다.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는 영적성장과 성화이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회개가 진정이었는지? 정말 그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것은 삶의 변화이다. 삶, 사상, 가치관, 세계관에서 성경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거듭난 영적생명의 성장이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구원의 회개가 확실할지라도 영적훈련이 아직 너무나도 미비하면 뚜렷한 변화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의 눈에 흔적이 없다하여 쉽게 죽은 영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확실하게 구원의 감격을 느끼는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성경적인 변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 좋은 좋은 예가되는 인물은 예수님을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이다. 그는 구원의 감격을 느끼는 순간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 19:08).

구원의 회개로 인해 거듭남과 새로운 생명을 얻고 나면 즉시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전까지 즐기고 좋아하던 죄에 대한 새로운 태도이다. 느낌이 달라진다. 서서히 결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시작되는 성화이다. 성령께서 성화의 역사를 시작하시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치 못한 오래 묵은 죄악된 습성들과 취미와 기질과 각 종의 죄들이 다스려지는 성화의 회개가 일어난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쉬지 않고 일어나는 과정이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활동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구원을 이룬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러나 신사도운동가들은 이 말씀을 성도의 구원의 불안정안 달랑거림으로 해석한다.

<성화의 회개는 일평생 지속되는 성령의 열매이다!>

신사도운동에 미혹된 불쌍한 목사들과 참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의 차이는 여기에서 극명하게 갈라진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구원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구분하지 않는다. 구원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동일시하거나 혼합하여 설교한다. 구원 받은 후에 성화와 영적성장의 도상에서 일어나는 회개를 지옥으로부터 건지움 받은 구원의 회개와 같은 차원에서 가르친다.

그리고 그 회개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구원을 유발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신앙적 공로와 조건으로 만들어 간다. 성화의 도상에서 죽기 바로 직전까지 이어지는 성화의 회개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도 전적으로 사람의 의지인 것처럼, 그때마다 천국과 지옥이 교차되는 것처럼 선포한다. 이것이 사탄의 계교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보가 더 큰 말씀의 변질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사도바울이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했던 일이 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성경에는 말씀을 변질하거나 왜곡하거나 더하거나 빼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런 일을 기어이 당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분명히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신사도운동에 빠진 불쌍한 목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빗나간 회개를 반복하는 사람들에게서 다 나타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일지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 마치 벌건 대 낮에 강도가 기승을 부리듯이 버젓하게 그런 설교를 하고 다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순진하고 우매한 성도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은혜 없는 종이 되어간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끝까지 구원을 유지하는 사람은 2% ~ 15%에 불과하다고 그 자칭 사도가 입신하여 천국을 보고 온 사람들의 간증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시니 더욱 오금이 조리고 떨릴 것이다.              

구원의 여정에서의 회개와 성화의 여정에서의 회개는 다르다. 성화의 여정은 일평생이며, 성화의 회개도 일평생의 일이다. 전혀 열매가 없는 나무는 산 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이듯, 전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러나 성화의 회개가 더디고 느리다고 해서 그가 죽은 영혼이거나, 지옥에 떨어질 영혼이라고 설교하면 안 된다. 영혼이 분명히 거듭났을지라도 영적훈련이 시작되지 않았거나 미약하면 행동과 성품과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보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다!>

아무리 믿음이 게으르고 열매가 없을지라도 다시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설교할 수 없다. 성도의 영혼의 보존은 성도 자신의 노력과 힘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영속은 인간 자신의 행위와 믿음에 달린 것이 결코 아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았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롬 5:8).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에 우리 영혼에 이미 미쳤고, 아무 공로가 없음에도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주권적으로 구원하셨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성도의 영혼의 보존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 성도의 구원의 영속성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달렸다.

마귀는 절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도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있는 구원받은 성도의 영혼을 빼앗지 못한다. 만일 마귀가 우리의 죄나 다른 어떤 다른 수단으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내어 다시 지옥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못 믿겠다. 나를 마귀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그가 왜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부분에서 마귀와 타협하거나 협상하지 않으신다. 마귀는 하나님의 그 영역을 절대로 넘보지 못한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 1:12).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8:39).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아무도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한번 영생을 얻은 자는 다시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인간의 머리는 이 진리를 이해하고 담기에는 너무나 작다. 그래서 나도 어리석게 이전에 이 진리를 바로 가르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마귀는 하나님이 택하신 영혼을 건드리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죽였다 살렸다 변덕을 부리시지 않는다. 마귀는 우리에게 고난을 줄 수 있을지라도 영혼을 빼앗거나 죽이지는 못한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신사도운동 교회의 이단 목사들의 사상은 마귀의 힘을 찬양하는 악한신학이다. 마귀가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에 걸려드는 대부분의 불완전한 성도들이 다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구원하는 하나님이나, 다시 지옥에 가도록 만드는 마귀나, 서로  잡아당기는 방향이 다를 뿐 단순 능력으로 치자면 누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신사도운동은 이런 방식으로 마귀를 높인다.

사랑하는 자녀가 지옥가게 되어도 그대로 방관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죄에 빠진 자녀를 회개하도록 책망하시고 때리시기까지 하심으로 기어이 건지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빼앗기지 않는다. 불순종의 죄를 짓고 도망간 요나를 깊은 물에 던져지게 하시고, 큰 물고기가 삼키게 하시고, 다시 뭍으로 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영혼과 지옥과 천국, 모든 것을 다스리고 주관하신다. 주권과 권능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마귀와 공유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신사도 운동은 어느 정도 죄를 회개하고 도덕적 영적 수준이 평균은 넘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그래야 구원이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성경은 모든 죄인들이 조건없이, 값없는 은혜로 피 묻은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만 회개하는 것처럼 강조한다. 각자가 회개하고 안하고에 따라 영혼의 생사가 갈린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회개하여 은혜에 이르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확실하게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영혼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과 은혜에 근거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죄인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진부한 주제라고 가르친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회의 질이 떨어지고 성도들이 저질로 전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십자가를 통해 부으시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이다.  

<신사도운동은 기독교의 핵심을 약화시킨다!>

생각을 조금만 하면 신사도 운동의 성경을 파괴하는 악한 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대도 많은 목회자들이 구별하지 못하고 성도들을 경계시키지 않고 있다. 신사도운동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성령의 인도하심, 보혈의 권능을 약화시키거나 실종되게 하고 있다. 그 대신에 자력구원, 자력갱신, 자가회개를 가르친다.

그들의 최고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있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다양한 모든 것들이 풍성하게 넘치고 있다. 더욱 뜨거운 기도, 더욱 빈번한 회개, 뼈와 살까지 다 녹이는 굉장한 찬양, 여름보다 뜨거운 단기선교, 매 주일 이웃 교회에서 이탈하여 몰려오는 교인들이 넘친다. 이것을 부흥이라고 자랑한다.  

과연 그들의 중심에 피 묻은 십자가가 있는지 보라! 과연 그들의 의가 십자가를 통하여 받은 의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의 시작이고 근거이고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 교회들의 의는 자신이 회개하는 행위를 통하여 얻고, 계속 회개함으로 유지되는 의이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다. 이상하게 여러 면에서 그들의 색채는 구약적이다. 갈보리 언덕에 피 묻은 십자가가 서기 이전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빼 박은 사람들이다.

그것이 신사도 운동 교회의 신앙이다. 특히 그들의 회개도 구약적이다. 그들의 많은 설교들과 핵심 주장들을 보노라면 지금 우리가 신약 교회에 속했는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결국 하면 할수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멀어지게 만들고 있으므로 신사도운동의 회개도 짝퉁인 것이 분명하다.



2009.12.04 정이철 목사님 http://www.cantoncrc.com/
posted by isaiah_43 2011. 8. 31. 23:21


posted by isaiah_43 2011. 8. 30. 16:30
posted by isaiah_43 2011. 8. 30. 15:58

Muslim Ceremony in Vienna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 공인되기까지는 300년이 걸렸다. 중동과 중앙 아시아,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기독교 지역이 이슬람 지역으로 되기까지는 불과 백년도 걸리지 않았다. 유럽이 기독교 지역이 된 과정은 2천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켈트족과 게르만족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의 후예들이 기독교를 받아 들이기까지 적게는 수백년 많게는 천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유럽이 비기독교화의 과정을 겪은 시간은 4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를 두고 유럽의 역사적 세속화(Historical secularization)라고 부른다. 유럽은 비기독교화(De-Christianization)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만이 아니다. 이보다 더 큰 파도처럼 덮쳐오는 이슬람의 파고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리비아의 가다피의 말처럼, “총칼없이 유럽은 이슬람화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며 “그 기간은 수십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유럽의 많은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한편, 우리에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무엇이 이토록 빠른 유럽 기독교의 약화”를 가져 왔으며, 반면 “이토록 빠른 이슬람의 성장”의 요인은 무엇일까?

기독교 진영이 추구하는 기독교 선교와 전도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회심과 믿음의 선택에 있다. 하지만 이슬람의 선교는 전도와 포교에 있지 않고 제도의 개혁(샤리아 법이 실현 가능하도록)과 금융, 경제, 군사, 문화 그리고 정치와 종교 행위에 이르기까지 통합하는 총체적 시스템 구축에 있다. 그럼으로 비무슬림에서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는 것도 궁국적으로 이슬람의 통합적 시스템 구축을 가능케 하기 위한 전략적 단계에 불과하다. 이슬람화를 위한 정당한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개인의 개종, 국제 결혼, 도시 건설, 금융 시스템 구축, 대규모 이민, 인구의 자연 증가, 무역의 증대, 교육과 문화를 통한 다와(Daw’ah)의 구축, 방송 매체, 그리고 정치 통합을 통한 이슬람 선교이다. 이슬람 선교는 모든 영역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기독교 선교과 이슬람 선교의 근원적 차이점은 개인의 회심과 통합적 시스템 구축이다. 이슬람의 통합적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라면 구제, 회유, 한시적 거짓말(이는 포교를 위한 수단으로), 전쟁(지하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불사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슬람에 있어서 이슬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슬람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으면 비이슬람으로서 평생을 굴종과 굴레에 묶여 사느냐의 문제이다. 비무슬림으로서 이슬람권에 사는 사람의 문제는 매일 매일 드려지는 아잔의 기도로부터 시작해서 마치는 시간까지 법과 제도, 국가와 군사, 경제와 문화, 교육과 인간의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움직이는 통합적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절한 삶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지역이 일단 이슬람 지역이 되는 순간에 각 개인의 자유와 상관없이 세금과 병역의 의무, 법과 제도 그리고 공동체(움마)의 울타리를 세대와 세대를 걸쳐 피할길이 없다. 이슬람 지역에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으로 세대를 거쳐 생존해야 할 가능성은 차라리 참담함에 가깝다.

“기독교 진영이 이슬람의 선교 방식을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들은 기독교의 안방을 이전에도 그리했듯이 지금도 밀려 들어 오고 있다.

마호메드 사후에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슬람은 엄청난 속도로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갔다. 마호메드가 죽은지 불과 몇 년 안되어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의 초승달에 평정되었다. 마호메드의 후예들이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를 정복하고자 벌인 치열한 전쟁은 이슬람 팽창사에 기폭제가 된다. 그 전쟁의 핵심에 선 장군 누아만은 크테시폰 전투에서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한다. 무타구치 요시로가 쓴 중동의 역사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를 보자!

“우리들은 과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알라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예언자 한 사람을 보냈다. 그는 우리들의 동포이며 게다가 가장 고귀한 집안의 분이다. 그는 우리들을 이교도이 어둠에서 진실한 가르침의 빛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미 그는 돌아 가셨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가르침에 속하지 않은 자 모두와 싸우라고 유언하셨다. 즉 그자들은 가르침에 귀화하든지, 공물을 바치든지, 아니면 무기를 들고 저항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만약 가르침을 믿으면 우리들은 그대들에게 왕국을 남길 것이다. 믿고 싶지 않으면 공물을 바쳐라. 모두 원하지 않는다면 싸울 준비를 하라”

상기의 글은 이슬람 선교와 전쟁의 조건을 잘 말해준다.
1. 가르침에 귀하하라! 즉 무슬림으로 개종하라!
2. 개종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라!
3. 아니면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겠다!

위의 세가지는 인류 역사 가운데 왜 이슬람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단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그 제자들에게 주시고 이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 예수 앞에 이끌기까지 죽음도 불사하고 전하지만 개종을 위한 강요나 또는 세금 부여나 또는 국가와 국가, 그리고 지역과 지역을 가르는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씀은 없었다. 천국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천국은 죄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리만이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의 나라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이땅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종교라는 미명하에 기독교에서 이슬람의 영역으로 개종이나 믿음이라는 영역에 가면 그것을 바라보는 개념과 세계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 있어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이슬람의 공격 가운데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공동체(Duhmitude)로 살아온 중동의 기독교인들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 교육과 정치, 문화, 그리고 종교 행위에 일으기까지 불평등 대우를 받아 왔다. 이집트 정교회 출신으로 1400년 동안의 처절하고 비참하리만치 아프고도 서글픈 이슬람권 기독교인들의 역사를 담은 “Bat Ye’or 의 “Islam and Dhimmitude: Where Civilization Collide” 을 글을 읽노라면 등골이 오싹하리만치 돌진해 오는 이슬람의 도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천년을 넘게 질기고도 질긴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중동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모래폭풍 일으키며 그 잔악무도한 말밥굽에 숨소리 죽여야 했던 기독교인들의 초라함이 그녀의 책에서 묻어 나온다. 예오르(Ye’or)의 책은 이슬람의 두 전략 평화와 정복, 그 대답은 복종(이슬람) 또는 전쟁(지하드)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기독교에 있어서 종교는 믿음의 문제이기에 국가의 체제와 정치, 군사, 문화, 경제, 그리고 사회전반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종교는 무슬림대 비무슬림, 선택 사항이 아닌 조건없는 운명적 굴종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비이슬람권에 있어서 종교와 정치 그리고 문화와 삶은 별개의 문제라는 등식은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이슬람권에 있어서 이러한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독일의 어떤 크리스찬이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슬람 지역에서 무슬림이 기독교나 기타 종교로 개종하는 일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는 코란이 무슬림이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개종하는 가족 일원에게 명예 살인하지 않는 것도 신성모독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개 만든 것은 비단 코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와 가족, 공동체와 삶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개종이 관계된 복잡성은 너무나 깊고도 끈질기다. 어떤 무슬림이 개종하는 순간 국가가 경영하는 종교 경찰의 심문부터, Hadith 과 샤리아, 정치, 인권유린과 명예살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종자가 당할 법적 지위의 박탈 즉 Muslim 에서 Dhumi(이슬람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 인 비무슬림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살아있는 순교의 현장이 된다.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우리의 환경과 모든 삶의 영역을 다 걸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 무슬림의 선택은 선택의 순간부터 그 간격이 엄청나다. 이슬람에서 의미하는 개종이라는 영역의 의미를 우리 기독교들은 주시해야 한다.

기독교 진영은 기독교는 종교라고 생각하지만, 무슬림은 이슬람이 단순한 종교의 영역을 넘어 삶의 방식(A Way of Life ), 문화와 관습과 국가와 정치를 포괄하는 총체적 체재라는 점이다.


이슬람은 삶의 방식(A Way of Life) 이기에 종교와 정치를 분리할 수 없으며, 문화와 삶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창조의 질서인 총체적 체재(Holistic System) 를 창조한 유일신 알라의 명령과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Islam” 의 진정한 의미가 된다. 중동 어디를 가도, 한국에도 이제 곳곳에 서있는 모스크에는 어김없이 초승달이 달려 있다. 모하메드가 메카에 위치한 히라 동굴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첫 계시를 받은 날 밤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다고 하여 수도원의 십자가를 떼어내고 초승달로 대체하게 되었고, 이제 초승달은 이슬람의 상징이 되었다. 모하메드 이전에도 초승달 무늬는 3세기부터 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이라크 일부와 와 이란 지역을 통치했던 사산 왕조의 왕권의 상징이었다. 특히 모하메드가 속한 쿠라이시 부족은 달신을 섬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달신이 이슬람의 상징으로 바뀌어 무슬림의 형제애를 가르키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기독교인이 기독교 지역에 살고 있다 해도 그가 드리는 행위인 예배와 십일조, 구제, 그리고 순례가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기독교적 행위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사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 체재가 한 번 세워진 곳에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 종교, 정치, 문화, 교육, 군사, 경제 행위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의 총체적 체재에서 벗어 날 길이 없도록 무조건 이슬람 체제에 순응하도록 되어 있다. 무슬림이 되는 순간부터 꼭 지켜야 되는 몇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슬람권 아래의 무슬림은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지켜야만 한다. 이 다섯가지가 바로 신앙 고백, 예배, 구제, 단식과 성지 순례이다.

무슬림이 지켜야 하는 기본 행위 다섯가지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Five Pillars of Islam)의 첫걸음은 매우 단순한다. 코란의 첫구절을 암송하면 무슬림이 된다. 이러한 일로 무슬림이 되는 과정이 복잡하고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 분들은 의외로 이슬람에 대한 경계를 풀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이 단순한 문구에 얽힌 엄청난 의미와 관계성을 모르기에 하는 생각이다.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 되는 첫 단추인 신앙고백을 이만(Iman)이리고 하는데 즉 믿음(신앙, Faith)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 신앙(Shahada, Faith)


무슬림이 되는 첫걸음은 의외로 쉽다. 코란의 첫 구절은 “알라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오직 알라만 있으며, 모하메드는 알라의 선지자 ( أشهد أن لا إله إلاَّ الله و أشهد أن محمدا رسول الله )”라는 고백을 하면 된다. 이를 Shahada 즉 신앙고백이라고 부른다. “앗쉬아두 안라아(알라) 일라하 일라, 와 앗쉬아두 안나 무함마다안 라쑬로 알라(ʾašhadu ʾan laa ilāha illa (A)llāh, wa ʾašhadu ʾanna Muḥammada(n) rasūlo (A)llāh)를 암송하는 것 하나만으로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신앙 고백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문구 하나에 성경 전체와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부인케 하는 엄청난 책략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 될 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고 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이시요, 그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사 나의 사하셨으며, 나는 그분이 나의 구주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하자. 그의 고백 이후에 그에게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은 별로 많지 않다. 특별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할 필요도 없고, 반드시 어떤 지역을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여행할 요구는 더더욱 없다. 그의 마음에 회의감이 들거나, 설령 배교하거나 타락해도 그것은 개인의 신앙에 달린 일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무슬림이 배교하면 알라를 거역하는 신성모독이 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독교나 타종교로 개종할 수 없으며, 자신의 자녀와 또 자녀 세대에 걸쳐 이슬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더군다나 무슬림 여성은 비무슬림 남성과 결혼할 수 없다. 한번의 개종이 수백세대를 거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엄청난 굴레가 이 단순한 단어 ‘신앙고백(Declaration of Faith)’ 즉 ‘샤하다(Shahada)’ 에서 이루어진다. 매우 쉬운 것 같으나 돌이킬 수 없는 숙명의 나래로 떨어뜨리는 이슬람의 ‘신앙고백(샤하다)’의 힘을 간과하지 말자!

2. 예배 (Salah)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은 알라에게 살라 즉 예배(Salah)를 드려야 한다. 이는 의무사항은 하루에 반드시 다섯번씩 알라에게 직접 기도해야 한다. 코란을 잘 아는 사람이나 아니면 회중 가운데 택일하여 이 기도를 드리게 한다. 대부분의 모스크에서는 이맘이 이끈다. 이 기도는 새벽, 낮, 늦은 오후, 석양질때, 그리고 한 밤중에 행해지고 리듬이 있는 곡조와 함께 다섯번의 기도를 드린다. 이때 드려지는 아잔 기도(Adan)는 다음과 같은 것을 선포한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 외에 다른 이를 섬기는 것이 없음을 나는 증거한다.
알라 외에 다른 이를 섬기는 것이 없음을 나는 증거한다.
기도하러 오라!
기도하러 오라!
성공으로 오라!
성공으로 오라!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 외에 다른 이를 섬기는 것이 없음을 나는 증거한다.

무슬림이 되는 순간부터 코란의 첫장에 나오는 7구절은 모든 무슬림들이 매일 드리는 기도문을 암송하며 하루에 다섯번씩 기도를 드려야 한다. 매일 드리는 무슬림의 기도문을 Al-Fatiha 라고 부른다. 아래의 그림에는Al-Fatiha 라는 7개의 기도문이 아랍어로 쓰여 있다.

7개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1. 가장 자비로우시고, 언제나 긍휼이 많으신 알라의 이름으로 (بِسْمِ اللّهِ الرَّحْمـَنِ الرَّحِيم: Bismillāhi r-raḥmāni r-raḥīm , In the name of Allah, the Most Gracious, the Ever Merciful)


2. 우주의 주이시고, 공여자이시고 지키시는 알라에게 다 찬양하라 ( الْحَمْدُ للّهِ رَبِّ الْعَالَمِين:Al ḥamdu lillāhi rabbi l-' ālamīn, All Praises to God, Lord/Cherisher/Sustainer of the Universe)


3.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긍휼이 많으신 (الرَّحْمـنِ الرَّحِيم: Ar raḥmāni r-raḥīm, The Most Gracious, the Most Merciful)


4. 심판의 날의 주권자 (مَـالِكِ يَوْمِ الدِّين: Māliki yawmi d-dīn, Sovereign of the Day of Judgement)


5. 우리는 당신만을 예배하며, 당신께만 도움을 청합니다. (إِيَّاك نَعْبُدُ وإِيَّاكَ نَسْتَعِين: Iyyāka na'budu wa iyyāka nasta'īn, You alone we worship, and You alone we ask for help)


6. 진정한 길로 인도하소서 ( اهدِنَــــا الصِّرَاطَ المُستَقِيمَ: Ihdinā ṣ-ṣirāṭ al-mustaqīm, Guide us to the true path)


7. 당신에게 후의를 청하는 모든 이에게는 길을, 당신의 진노를 얻는 자와 잘못된 길을 가는 자에게는 그리 하지 마소서 ( صِرَاطَ الَّذِينَ أَنعَمتَ عَلَيهِمْ غَيرِ المَغضُوبِ عَلَيهِمْ وَلاَ الضَّالِّين: Ṣirāṭ al-laḏīna an'amta 'alayhim ġayril maġḍūbi 'alayhim walāḍ ḍāllīn , The path of those on whom You have bestowed your favor, not of those who have earned Your anger, nor of those who go astray)


상기의 7가지 기도문을 매일 암송하며, Al-Faithah 를 따르는 자들은 아민(Amin)을 말하게 된다.


한번 무슬림이 된 순간부터 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무슬림의 기도를 훈련받으며 일생을 두고 매일 다섯번씩 아잔 기도를 드려야 한다. 다음은 아잔 기도 드리는 훈련을 받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살라는 드물게 아랍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아람어(Aramaic)인 Hallow 라는 뜻에서 왔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축복’하거나 또는 ‘기도’하는 의미의 인간의 행위를 의미한다. 무슬림에게 있어서 살라는 종교적 의식이자 암송으로 이슬람 예배의 행위로 간주된다. 위의 그림이 보여주는 살라는 하루에 다섯번씩 의무적(fard)으로 행하는 기도로 자원하여 드리는 기도인 Nawafil 과는 구분된다. 살라는 이슬람의 다섯기둥 가운데 샤하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다. 매일 다섯번씩 드려지는 기도는 반복되는 말과 움직임을 동반하는 이를 라카(rak’ah)라고 부르는데 엎드리는 ‘절’을 지칭한다. 다섯번의 기도는 예배로 간주되며, 모스크가 없는 가정, 깨끗한 정원등 장소에 가림이 없이 드려지며 대략 10분 정도 걸린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에는 모든 무슬림이 함께 하는 합동 예배가 드려진다.

1일 5회의 예배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1. 파즈르: 알 파즈르(al fajr)라고 부르는 두번의 조용한 라카(raka’at)의 기도가 이 시간에 드려진다. 알 파즈르는수브흐(subh)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용하고 깨우기 때문에 불리우는 이름이다. 알 파즈르는 보통 동트기 전 새벽에, 특히 지평선에 줄을 긋듯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드려진다.


2. 주흐르(thuhr): 낮 예배로 정오를 조금 지나는 시간에 드린다. 막대기를 수평으로 땅에 세워 그림자가 정 가운데 놓이는 시간에 드린다. 이때는 4번의 조용한 라카(raka’at)를 행한다.


3. 아스르:오후인데 주흐르와 마그립 중간으로 보통 오후 3시30분 경에 드린다. 하딧(hadith)에는 아수르가 드려지면 해가 완전히 질때까지 다른 기도를 드릴 수 없다고 한다.


4. 마그립: 해질때 드리는 기도이며 세번의 raka’at 을 먼저 행한 후, 큰소리로 두번의 raka’at 을 큰소리로 행한다. 마그립 기도는 보통 20분 정도 걸리는데 해가 지는 순간부터 마지막 붉은 황혼이 지평선으로 질때까지 드려진다.


5. 이샤: 밤에 드려지는 기도로 마그립 예배 후 약 1시간 반정도 뒤에 행한다. 먼저 네번의 raka’at 을 큰소리로 행하고 마지막 두번의 raka’at 은 조용히 드린다.

3. 구제( Zakat)


무슬림에게 중요한 원칙은 모든 것이 알라에게 속해 있다는 점이다. 알라의 부요가 인간을 신뢰함으로 맡겨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제라는 뜻의 아랍어 자카트(zakat)는 “정화(purification)” 와 “성장(growth)”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슬람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무슬림의 소유가 그들에게 사용되도록 정화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구제가 지속적인 새로운 성장을 가져온다고 본다. 각자의 무슬림은 각 개인에 따라 구제 액수를 정산한다. 기본적인 주거비와 직업에 필요한 도구 비용을 뺀 일년 수입 중 40분의 일 즉 2.5%를 기준한다. 각 개인에 따라 비공개로 자선금(sadaqah)을 자원해서 내기도 한다. 이러한 자카트를 모아 이슬람력 10월 1일에 가족에 수에 따라 지불해 주는 희사금을 쟈카뚤 피뜨르라고 한다. 그러기에 구제 즉 자카트는 구빈세와 같은 세금의 기능을 해 줌과 동시에 자선금 또는 희사금의 의미까지도 내포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무슬림으로 하여금 한 형제라는 강력한 연대감을 심어주게 한다. 이에 관해 코란의 앗 타우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로 자선금은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와 거기에 종사하는 자와 그들의 마음이 위안을 받을 자와 노예와 채무인 자와 알라의 길에 있는 자와 그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니 이는 알라로부터의 명령이라. 알라는 아심과 지혜로 충만 하시니라. (코란 9:60)

4. 단식 (SAWM)


이미 세계에 많이 알려진 라마단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 하나로 모든 무슬림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특히 중동 지역의 라마단 기간에 여행해 본 분들은 그 위력을 실감했을 것이다. 이슬람력으로 히즈라 즉 9월로 ‘라마단” 1개월 동안 행해지는 단식(사움)을 말한다. 해 뜨는 아침부터 해 지는 저녁까지 어떤 음식도, 물도, 배우자와의 성관계도 금지시키는 강력한 금식 기도가 라마단 기간에 행해진다. 이때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식욕, 성욕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억제해야 한다. 말과 행도 그리고 악에 대해서도 내적 절제를 통해 정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몸이 아프거나, 노약자이거나 또는 여행중이거나, 생리 중인 여성이거나, 임신 중이거나 또는 젖먹이는 중인 여성에게는 금식을 하지도 않아도 되며 그들이 나중에 해가 다 지나가기 전 건강하거나 능력이 되면 남은 일수를 채우면 된다. 어린이들도 금식 기도에 참가하거나 또는 관전할 수 있다. 라마단 금식은 자신의 정화(self-purification)와 자기 절제(self-restraint)를 주 방법으로 사용된다. 스스로 세상의 안락함으로부터 끊음으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알라의 존재 앞에 자신의 목적을 그에게 맞추는 기간으로 보고 있다. 코람의 알 바까라에 다음과 같은 금식의 언급이 나온다.

너희 선임자들에게 단식이 의무화된 것처럼 알라을 믿는 너희에게도 단식은 의무라. 자제함을 통하여 의로워질 것이라. 정하여진 날에 단식을 하면 되나 병중에 있거나 여행 중에 있을 때는 다른 날로 대응하되 불쌍한 자를 배부르게 하여 속죄하라. 그러나 스스로 지킬 경우는 더 많은 보상이 있으며 단식을 행함은 너희에게 더욱 좋으니라. 실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라. 사람을 위한복음으로, 그리고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라마단 달에 꾸란이 계시 되었나니 그 달에 임하는 너희 모두는 단식을 하라. 그러나 병중이거나 여행중일 경우는 다른 날로 대체하면 되니라. 알라는 너희의 고충을 원치 않으시니 그 일정을 채우고 너희의 편의를 원하시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복음을 주신 알라께 경배하며 감사하라. (코란 2:183-185)

5. 성지 순례 (핫지)


인종과 지역 그리고 세대와 세대를 하나로 엮어 무슬림이라는 강력한 연대감을 심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순례이다. 기독교에는 성지 순례가 이러한 연대감이 없지만 모하메드에 의해, 특히 코란에 명령한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물론 여러번 행할 수 있고) 메카를 순례하는 성지 순례(Hajj)는 이슬람에서 있어서 무슬림이라는 일치감을 주는 중요한 기둥이다. 이슬람의 성지 순례는 대순례(핫지)와 소순례(우므라)로 나뉜다. 무슬림의 한 생애에 그들의 건강과 재력이 허락하는 한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메카를 순례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핫지는 이슬람력 12월 10일을 전후로 행한다. 무엇이 매해마다 2백만명의 무슬림으로 하여금 그곳으로 향하도록 하는 동력이 되는가? 이는 유일신 신앙을 고수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전례를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코란의 알 바까라에 다음과 같은 명령이 나온다.

대순례는 명시된 달에 행하되 순례를 행하는 자는 성욕과 간사하고 사악한 마음을 갖지 말 것이며 언쟁도 하지말라. 그리고 선행을 행하라. 그리하면 알라께서 아실것이라. 내세를 위한 양식을 마련하되 가장 좋은 양식은 이성이 있는 자들의 정직한 품행이라. 그러므로 현명한 자들아, 나를 두려워하라. (코란 2:197)

코란에 명시된 것처럼 다신교 신앙이 팽배하던 메카에 유일신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의 믿음을 기리기 위해 저들은 성지순례를 행하는 것이라고 저들은 말한다. 이는 유일신 알라에 대한 신앙을 “성지순례와 고행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신앙을 기리고 자신들도 알라에 대한 믿음과 선례를 답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순례객들은 카바(Ka’bah)를 일곱번씩 돌게 되며, 사파(Safa)와 마르와(Marwa) 사이를 일곱씩 왕래한다. 사파와 마르와는 메카에 위치한 작은 두개의 언덕(산)으로 핫지와 움라흐(Umrah)의 순례를 종교 의식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곳은 하갈(아랍어로는 하지르, Hajir)이 광야에서 물을 구할 때, 샘물이 터진 곳이기 때문이라고 저들은 믿는다. 순례객들은 7번의 걸음을 마치고 메카 외곽에 있는 광대한 광야에 모여 알라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는 심판의 날에 대한 예비 관람(preview)인 셈이다. 그럼 저들은 왜 일곱번씩 두 언덕 사이를 돌아야 하며, 무엇때문에 그런 순례를 해야만 하는가?

이 점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과 유대교의 근원적 차이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슬람의 전통에 의하면, 알라는 아브라함의 아내 하갈(Hagar)과 그의 간난아기를 생필품(provision)만 주고 광야로 내몰게 한다. 이는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갈이 내 몰린 곳이 바로 사파(Safa)와 마르와(Marwah) 사이였다고 한다. 하갈과 아이가 가진 모든 음식이 떨어지자 하갈은 도움을 청하게 된다. 하갈은 더 쉽고 빠르게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이스마엘을 땅에 버려두고 물을 찾기 시작한다. 그녀는 홀로 가장 가까운 언덕인 Al-Safa, 사파 언덕을 오르게 되고 그 주위를 살피게 된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본 그녀는 다른 언덕인 Al-Marwah, 마르와 언덕으로 가게 된다. 그녀는 그곳에서도 아무서고 찾지 못하고 다시 사파로 간다. 그 사이에 하갈은 이스마엘이 안전한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녀가 두 언덕 사이의 계곡에 있을 때에는 이스마엘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 하갈이 계곡에 있을 때에는 달리기 시작하였고, 이스마엘을 볼 수 있는 평야에서는 달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하갈은 강력한 땡빛이 내리치는 대낮에 일곱번씩 두 언덕 사이를 왕래한 후 이스마엘에게로 돌아 온다. 그후 울고 있는 간난아기인 이스마엘이 모래바닥을 문지르니 샘물의 입구 모양이 되고 급기야 물이 터저 나오게 된다. 이 우물이 바로 잠잠우물(Zamzam Well)이다. 이 우물은 알라가 하갈에게 천사를 통해 선사한 우물이라고 한다. 이 우물의 크기는 좌우 18 14 feet 정도된다.

메카를 성지로 만들어 카바를 비롯해 사파와 마르와 언덕까지 포함하는 지역을 포함하는 가장 큰 모스크라 일컬어지는 이곳을 마스지드 알 하람(Masjid al Haram) 이라고 부른다. 400,800 sq meters (99에이커 정도의 넓이) 에 달하는 이곳은 전세계 무슬림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바로 이곳 안에 카바가 위치해 있고 핫지(순례)의 걷는 의식(sa`i, Arabic: سعى)이 시작되는 데, 사파(Safa) 까지는 반마일정도이고, 마르와(Marwah) 까지는 100야드 불과한 거리에 있다. 사파와 마르와의 거리를 미터로 정산하면 450미터인 셈이다. 이곳을 왕복 일곱번씩 돌게 되면 대략 3.15 킬로 미터가 된다. 아래의 사진이 두 언덕 사이를 연결한 긴 통로(long gallery) 를 걷는 보여준다.

이때 순례객들은 핫지 기간동안에 알라에게 드리는 기도를 드린다. 다음을 클릭하면 그들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Talbiyah (real audio) - a prayer www.islam101.com/hajj/talbiyah1.ram
"Labbaik Allahumma Labbaik. Labbaik, La Shareek Laka, Labbaik. Innal Hamdah, Wan Nematah, Laka wal Mulk, La Shareek Laka"


"Here I am at Thy service O Lord, here I am. Here I am at Thy service and Thou hast no partners. Thine alone is All Praise and All Bounty, and Thine alone is The Sovereignty. Thou hast no partners."

앞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슬람의 근원적 기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큰 질문이 생길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관계만 보아도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창 11:26)로 나와 있으나 코란에는 아자르(Azar; 코란 6:74)로 나와 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양육했던 곳은 헤브론(창 13:14-18)인데 코란은 메카라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데아 우르(창 11:31, 12:5)인데 코란은 메카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통해 가나안으로 여행(창 11:31, 12:5)했는데 코란은 그것이 아니라 메카로 여행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약속을 준 자손은 이삭(창 17:18-21, 22:2)인데 코란은 사라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라고 한다. 이스마엘은 이집트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낸 적(창 12:10)은 있으나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메카에 카바를 건립했다는 기록은 없다. 코란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랍인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기 보다는 종족적으로 욕단 (Qahtan or Joktan)이다. 욕단의 아들들의 이름들은 아랍지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름들이다. 스바(Sheab), Hazarmaveth, Ophir, Havilah와 같은 이름들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요르단) 야곱의 형 에서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요르단) 아브라함의 세번째 부인인 그두라(keturah, 창 25:1-4)의 6명의 아들들은 아랍의 조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스바(Sheba)와 드단(Dedan)은 예맨에 거주) 이와같이 메카를 성지로 삼고 아브라함의 무덤이 카바에 있다고 주장하고, 시내광야를 지나 이집트 접경으로 간 하갈을 지금도 불가능하지만 메카까지 갔다고 하는 주장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 더 어려운 것은 이미 소년으로 성장한 이스마엘이 하갈과 함께 하였는데 코란이 주장하는 것처럼 간난아기라는 사실도 수긍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다음에 나누고자 한다.


온세계의 무슬림을 하나로 묶어 쉽게 이끌어 가는 것 같은 신앙고백과 예배, 구제와 단식 그리고 성지순례에는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오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출처: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BOKT/15695


posted by isaiah_43 2011. 8. 27. 23:50
posted by isaiah_43 2011. 8. 27. 12:15

에스더 금요 철야
2011년 8월 26일 (금)
강사: 다비드 리 선교사(예루살렘24시기도의집)

출처:  http://mvtv.kr/9b


posted by isaiah_43 2011. 8. 24. 22:00



인류의 역사는 성경 예언의 성취 과정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어떻게 신실하게 완성하시는가 에 대한 책이다

다시 말해 인류역사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과정이다

사탄은 어떻게든 이 언약을 막아보겠다고 설쳐댄다

다시 말해 영적전쟁은 이 언약을 기준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정치적인 일들 역시
언약을 기준으로 일어나고 있는 영적전쟁의 결과물들이다

이 과정 가운데 우리 민족의 부르심과 역활은 무엇인가?



열방샘교회 월요북한기도모임 2011.8.22
출처: http://www.youtube.com/LastMartyrs




posted by isaiah_43 2011. 8. 20. 22:00

에스더 금요 철야
2011년 8월 19일 (금)
강사: 김다니엘목사

출처: http://mvtv.kr/8m

posted by isaiah_43 2011. 8. 20. 08:46



모두들, 쓰나미를 통해
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기도 전에
마을이 예전의 모습을 회복함과 동시에
이들의 마음마저
예전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_내용 中


출처: http://vimeo.com/27916492

posted by isaiah_43 2011. 8. 19. 19:27



삼성교회/2011 청소년&청년 연합수련회 - 세째날 오전예배

5:20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 하셨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종교'를 벗어나지 못하면 지옥을 벗어날수 없다!!

출처: http://www.youtube.com/watch?v=a17ONZDgAlI&feature=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