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isaiah_43 2011. 9. 1. 23:03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신사도 운동교회들의 회개에 대한 설교는 강하다. 그들은 자주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한다. 나는 신사도 운동이 뭔지도 몰랐을 때에 그들 몇 목사의 설교를 듣고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일단 회개라는 단어가 자주 설교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요즘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과연 일 년에 몇 번이나 등장할까? 한번 신경쓰고 들어보는 것도 약간의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에서는 회개라는 말은 깊은 산 속의 산삼같이 진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개독교인”이라는 말에 합당한 저질 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가 무우처럼 흔하지는 않더라도 산삼처럼 보기 드물지 않았더라면 개독교라는 단어가 쉽게 한국 사회에서 먹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는 떼를 지어 부지런히 다녔지만, 세상의 마음이 숙연해지게 하는 믿음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개독교라는 조롱하는 말이 쉽게 먹히고 말았다.

신사도운동 교회들의 강한 회개의 외침은 바로 이런 상황과 잘 맞았다. 마치 천상으로 호출되어 진노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곧 바로 세상에 보내어진 선지자의 일성으로 다가왔다. “교회만 다니면 다 구원 받습니까? 예수를 영접한다고 기도만 따라하면 다 구원 받습니까? 죄를 짓고도 아무 가책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 회개하세요! 회개하지 않으면 믿는 자도 지옥에 갑니다!”

그들 몇 목사들의 회개에 대한 설교는 확연하게 나와 다른 목사들의 설교와는 달랐다. 그래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설교를 들으며 나에게 부족하고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을 배우고 보충하려고 시간을 들였다. 그런데 조금 더 듣고 연구하니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세례요한 같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세례요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을 닮은 것 같기도 하였지만, 바울의 스타일은 더욱 아니었다. 별종의 회개 멧시지였다.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회개운동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믿는자들을 다 싸잡아서 저질이라며 욕을 보이는 부끄러운 개독시대를 살며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잘못되었나?”, “정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가?”라며 반성의 부담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메신저로 다가온 바로 그들이 알고보니 신사도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사도, 선지자들이었고, 아니면 그 주변에서 함께 얼쩡거리는 쟁쟁한 신사도운동가들이었다.  

<신사도운동의 회개는 십자가와 맞지 않다!>

회개에 대해서 제대로 바르게 전하기나 하면서 그런다면 좀 이상한 구석이 있을지라도 그냥 봐 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왜곡하면서 회개에 대한 강박관념만 가지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를 듣고 금새 그들의 회개 병에 동화된다.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 쉽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면서, 그런 이상한 회개의 열기를 전파하는 작고 이상한 선지자들로 변해버린다.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가 그 사람들과 점점 더 멀어지는 확실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사도운동가들이 전하는 회개의 가르침의 내용은 복음적이지 않고 율법적이다. 율법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내실 형벌을 예상하고서 그 형벌로부터 미리 벗어나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하게 만드는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이고, 신자가 회개하는 긍극적인 목적은 진노 아래 떨어지지 않고 현재의 행복과 번영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가들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할 때에 대부분 곧 임할 전쟁, 지진, 화산, 기근 등의 재앙에 관한 묵시가 동반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곧 그런 일들이 임한다고 한다.

2010년 6월에 검은 아프리카 사람 데이비드 오워(자칭 선지자)가 한국에 와서 한국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경고하신 예언이라면서 전했던 황당한 메시지가 그랬었다. 한국이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이 난다고 했다. 미사일이 날아들어 발전소가 터지고, 빌딩들이 무너지고 ... 어쩌면 핵이 터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무렵 주일 설교 시간에 아프리카 무당의 형편없는 개소리라고 말해 버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편으로 두려워했고, 심지어 많은 목사들까지 들어서 손해 될 일이 없다며 성도들에게 회개를 권유했었다. 회개라는 중요한 단어와 개념을 강조하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비해져야 한다고 하니 사실 여간 혼란스럽지가 않다.

그러나 그런 회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하라고하시는 바라시는 회개가 아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일까? 그런 말을 듣고 아무리 회개를 아무리 많이 해도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고 영혼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오래 회개기도를 해야 그 재앙이 철회된다는 것인가? 또 그 당시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다음에 다시 잘못하거나 죄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진노를 보내시지 않으실 것인가? 지금 회개한 것이 그때까지 유효할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는가? 율법적인 회개에 세뇌당하면 계속 이러한 진노와 회개의 쳇바퀴에 벗어날 수가 없다. 영원한 구원으로 인한 성도의 행복과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확실한 은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성도에게 주신 자유 등의 기독교 신앙의 중심 기둥들이 부러지고 만다. 그래서 사탄은 시시적절하게 이런 율법적인 회개사상을 퍼뜨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회개는 복음적 회개이다. 복음적인 회개의 원인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심판과 재앙이 아니고 이미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다. 심판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회개가 아니고, 십자가를 통하여 보내신 성령의 감동을 입어 변화된 마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회개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되고, 그 말씀에서 심히 벗어나 있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됨으로 회개하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가 많아지고 깊어 질수록 그 성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그 영혼이 더욱 행복하게 되고 자유하게 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복음적 회개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 15장 회개에 관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질과 의로우신 법에 반대되는 자기의 죄들의 위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더러움과 가증함에 대해서 보고 느낌으로, 그리고 회개하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음으로, 자기의 죄들을 매우 슬퍼하며 미워하며, 그 모든 것들로부터 들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와 그의 계명들의 모든 길들에서 그와 함께 걷기를 결심하며 노력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신사도운동가들의 회개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율법적이다. 외국의 신사도운동가들보다 이상하게 한국의 신사도운동가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피터 와그너나 다른 외국의 신사도운동가들이 노골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한국과 미국의 이민교회의 대표적인 신사도교회의 목회자들은 거침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간다고 설교하고 있다.  

그러한 회개 설교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회개가 하나의 구호가 되어 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 구호를 외치면서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 다른 곳으로 빠져 들어 간다는 사실은 더욱 심각한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어떤 교회로 옮기고 나더니 그렇게 변해가는 친구나 이웃을 보고서 걱정하고 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친구가 새로운 교회로 옮기고 난 후에부터 갑자기 회개에 대한 이야기 하고, 전쟁이니 지진이니 ... 그런 소리를 갑자기 자주 하고 있다면 걱정하시면 상담하는 매일을 주셨다. 그 교회의 홈페이지를 보니 세계도처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사고와 재해들에 대한 소식이 CNN 방송같이 빠르게 보도되고 있었다. 신사도운동 교회였다. 그런 것들이 모두 그들의 불순한 회개사상과 얽혀있는 것들이었다.

온전치 못한 연약한 양들을 지배하려는 술책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뭔가 다른 선지가적인 설교로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크고 작은 다양한 죄를 달고 사는 죄인들이며, 누가 강하게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이 찔리고 약간이라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충 아무에게나 조금만 분위기를 잡으면서 “당신의 죄가 다 드러났습니다!”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색이 달라진다. 오래 전에 영국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정치인 10여 명에게 아무런 보충설명을 달지 않고 아주 간단하게 “다 들통났습니다!”라는 짧은 문장의 전보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전보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조용히 잠수하여 한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죄를 항상 달고 산다. 성도들에게도 죄가 달려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오직 공동묘지에서 누워있는 자들에게만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마음이 더 순수하고 여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신사도운동의 회개에 속아서 함께 휩쓸리는 것이다.  

<죄에 대한 바른 태도가 참 믿음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는 믿음의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나야 한다. 믿음의 증거들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참 믿음의 증거는 죄에 대한 우리의 자세이다. 이전에 즐기던 죄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지적으로 친근하지 않아야 한다. 혹시 죄를 범하더라도 속히 하나님 앞에서 바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비성경적이다. 죄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해야 성경적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나는 성경을 제대로 아는 바른 목사라고 자부한다. 또한 목사이건 일반 성도이건 상관없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다시 죄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일평생 신실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사람이라고 칭창 받았던 다윗도 그만 쉽게 죄에 빠지고 말았다. 이웃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서 그만 죄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지도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왕의 권세로서 자신의 죄의 욕망을 쉽게 성취하여 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인은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장수의 아내였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다시 그 충성스러운 부하까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이용하여 죽이는 또 다른 악한 죄를 짓고 말았다.  

인간은 죄에 대해서 너무 연약하고 대책이 없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비웃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부분에서만, 그리고 그 당시에는 조금 낳을 수는 있을지라도 다른 심각한 죄에 대한 큰 구멍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음란의 유혹에는 비교적 강하나 돈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돈에는 비교적 강하나 또 다른 죄에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귀는 한 가지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공략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각 사람들의 특성에 맞게 맞추어서 공략한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면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2,3)

다윗이 그렇게 넘어지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다. 정말 실망스럽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죄에 빠지는 그 장면으로만 그의 믿음을 결론 내리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적을 받게 되자 다음과 같이 그의 더러운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토하였고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하게 구했다. 성경은 그 모습까지도 전체 속으로 포함시켰다. 바로 이 모습도 참 믿음을 가진 성도의 진짜 믿음의 증거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이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인간의 실존을 설명했다. 구원 받은 한 성도 속에 두 가지의 상반된 성향이 존재하면서 서로 심히 투쟁한다고 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육신의 속성을 여전히 죄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 안에 이 두 가지가 있다. 서로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두 힘이다. 우리 속에서 서로 대치하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두 속성의 싸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다. 어떤 세력이 더 자주 이기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질이 변한다. 우리의 믿음의 품격도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서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80년대에 영화 터미네이터의 주연배우로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주지사가 되었던 신체가 탁월한 유명한 사람이 있다. 그는 외모와 인기와 명성과 돈과 권력 등의 인생들이 사모하는 모든 것들을 갖추고 누린 사람이다. 그런데 그도 알고 보니 죄의 종이었다. 25년 동안 자기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와 아내 몰래 죄를 지으면서 아들까지 낳아서 기르고 있었다. 이제 그 죄가 드러나서 명예와 가정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육신을 지배하는 죄로 인해 평생 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또 한 사람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프랑스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이며 현재 IMF 총재인 분이 맨하탄의 호텔에서 방 청소를 하기 위해 들어온 호텔의 여직원에게 죄를 지으려다가 인생을 망쳤다.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간신히 감옥행은 피했지만, 무장경관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부끄럽게도 발에 전자발찌를 차야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나와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자리에 서지 않았지만, 본성이 같은 죄인들이다. 시장의 상인이나, 밭의 농부나, 청와대의 대통령이나, 대학의 교수나, 병원의 의사나, 군대의 장군이나 모두가 같은 죄인이다. 예외가 없다. 아무리 세계적인 사람들일지라도 죄의 힘과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초라한 죄인일 뿐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게 36:26).

죄를 이기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오직 성령만이 죄를 구별하고, 거부하고, 이기게 하신다. 인간이 가장 죄를 잘 대적하고 이기는 때는 성령의 지배와 다스리심을 충만하게 받는 상태, 성령충만한 때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이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시면 마음에 죄를 대적하고 싫어하는 새로운 성향이 생긴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마음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죄를 탐하는 마음이 경계하고 대적하는 마음으로 변한다. 우리의 전 인격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죄가 들어올 수 없다. 성령충만은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미 들어온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은혜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절대로 죄를 깨닫지 못하고, 죄에 대한 애통이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에 구두 속으로 모래가 한 두알 들어갈지라도 걷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데 왜 눈 속으로 들어가면 견디지를 못하는가? 감각의 차이이고 부드러움의 차이이다. 발바닥의 감각은 너무 무디고 두껍다. 그러나 눈은 너무 섬세하고 감각이 예민하다. 그래서 모래알 보다 작은 이물질이라도 들어오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발바닥의 피부와 감각이 그렇게 변하면 모래에 대해서 똑 같이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에서 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살아난다. 완악하고 딱딱했던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버린다. 그래서 사람을 여럿 해친 사형수도 성령이 임하면 울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회개는 성령이 그와 함께하시는 증거이다. 성령은 죄인들을 항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결케하시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죄가 못 들어오도록 막기 위해서 성령충만해야 하고, 들어온 죄를 깨끗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도 성령충만이 회복되어야 한다. 죄를 대적하는 자세와 죄를 범했을지라도 참되게 회개하는 자세는 그 사람의 믿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회개는 영적전쟁의 절대적 요소이다>

물론 그 누구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다 그렇지!”라고 하며 너무 쉽게 죄를 용인하지 말고 죽도록 싸워야 한다. 가장 큰 마지막 싸움은 항상 바로 자신의 죄와의 싸움이다. 우리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싸움이 최고의 전투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가장 중요한 전투를 승리로 마감하기 위한 절대적 요소이다.

회개 없이 영적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회개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 수 없다. 회개 없이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도 없다. 회개 없이는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도 없다. 회개 없이 죄를 부리며 다가오는 마귀를 이길 수도 없다. 회개와 영원히 담을 쌓은 것은 하나님과 담을 쌓는 것이다. 회개 없는 믿음은 결국 죽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자주 많이 회개해야 한다. 나도 충분히 강력하게 회개에 대해서 설교하는 목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말로 회개! 회개! 회개! 하면서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성경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목사와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사도운동 교회의 목사들의 회개 설교는 또 다른 심각한 골치이다. 회개를 이상하게 남발하면서 복음을 왜곡해 버린다. 그들은 “진짜 구원 받은 성도도 회개 안하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거침없이 설교한다. 얼핏 생각하면 나쁠 것이 없다. 가능한 죄를 짓지 않게 만들고, 죄에 빠지더라도 빨리 회개하도록 하니 좋은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좋은 회개라도 어디까지나 성경적이어야 한다. 울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게 울어야 애통이고 간구이고 기도이다. 회개를 어찌 하느냐에 따라 참된 회개일 수도 있고 사탄을 즐겁게하는 종교적인 회개일 수도 있다. 회개가 잘못되면 사탄적일 수도 있을까? 복음적 사고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가슴을 시리게하는 서글픈 사실이다. 혹시 쉬지 않고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하는 사람의 영혼 속에서 구주의 피 묻은 십자가가 점점 왜소해지다가 그만 사라지고 마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면 이제부터 신사도 운동하는 목사들의 구원과 회개에 관한 설교를 주의깊게 들어보기 바란다. 그 설교를 듣고 흥분하고 돌아오는 성도들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 뭔가 분명히 보일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 앞장서는 그들의 설교를 듣노라면 과연 영혼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지에 대해 의심이 일어난다. 구원은 내가 나 자신의 회개를 통해 힘들여 획득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통하여 껄떡거리면서 유지하고 보수해야 하는 인간의 힘겨운 노력의 결실이라고 여겨진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써야 했던 동일한 상황이 2,0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미국의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들에게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참된 회개의 빈자리를 다른 것들이 넉넉히 메우고 있다>

그런 이상한 회개를 전하는 그들은 모두 자신을 선지자나 사도라고 한다. 강력한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그들이 일반 목사도 아니고 더욱 위대한 사도와 선지자라고 하니 일반 성도들로서는 감히 대항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과 권세가 어떻게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지, 새로운 기독교 세계가 어떻게 열리고 있는지 ...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면 좋겠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라! 그들의 입에서 예수의 보혈의 위대한 능력과 권세가 과연 제대로 선포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바란다. 카랑카랑한 선지자 분위기 풍기는 음성으로 회개를 죽도록 외치기는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이 없다. 그들이 이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회개를 매우 강조하는 것도 일반 교회와는 다른 점이지만, 더 심각하게 다른 점은 구원의 영원한 보루인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별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들의 복음은 우리의 복음과 질적으로 다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을 통하여 마귀가 집요하게 벌이고 있는 배교라고 하는 연극이다.    

그 잘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창안하는 신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없거나 너무나 왜소해졌다. 십자가가 없어진 그 공간이 그들의 요상한 복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열심과 기도와 회개와 봉사와 충성과  순종과 찬양과 기적과 입신과 방언과 다른 많은 것이 들어선다.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화려해 진다.  그러면서 그들은 "전세계적으로 부흥하는 모든 교회들이 신사도운동을 추진하는 교회들이다!", "하나님은 신사도운동하는 종들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라며 자랑한다. 동시에 그들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부흥으로 홍보된다.

나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들의 이 거짓 부흥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빈번한 단기선교, 뜨겁고 감동적인 찬양, 특히 일어서서 손을 들고 찬양하거나 손춤을 주면서 찬양하는 사람들, 신비적인 기도 소리들, 자기들끼리의 뜨거운 결속, 그 지도자들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순종 ... 이것들이 부흥의 진정한 증거들일까?  

이 자체가 꼭 나쁜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부흥의 알맹이도 결코 아니다. 십자가의 권세와 능력을 힘써 선포하지 않으면서 이런 따끈따끈한 현상이 일어나고 유지된다면, 절대로 반길 일은 아니라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별난 회개의 복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면, 그것이 부흥이고 성령의 역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끝까지 구원을 간직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라고 주장한다!>

신사도운동가들의 회개의 복음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다. "믿는 사람들 중에서 결국 구원 받는 사람은 2%~15% 정도이다!"라고 거침없이 말해도 통한다. "입신하여 천국 상황을 보고 온 사람들의 간증을 종합하여 보고, 예언자들의 예언을 종합해 보니 그런 통계가 나옵니다"라고 오중직을 모조리 다 가지신 서울의 한 자칭사도가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그 인사의 회개복음에 은혜 받아서 십자가를 부여잡기 보다는 더 힘써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일이 어찌 사람으로 부터 왔겠는가? 어떤 영리한 인간이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 이름이 S로 시작되는 그 영리한 것과 그의 종들이 벌이는 일일 것이다.      
구원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그 은혜의 넓이와 깊이는 인간의 필설로는 형용할 수가 없다. 십자가에서 발원한 구원의 강의 깊이와 넓이는 너무나도 엄청나다. 그래서 "Amazing Grace"라는 찬양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찬양이다. 신사도운동의 별종의 회개를 전파하는 그 추한 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간다! 회개하라! 회개해야 한다!"라고 설파하면서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인 보혈이 흐르는 십자가를 떠나게 한다. 대신 부지런히 회개하자고 한다. 그들은 십자가를 뽑아 버리고 사람의 회개의 말뚝을 대신 그 자리에 세우려는 신 율법주의자들인 셈이다.  

<구원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구분하지 못한다!>

회개와 구원의 관계, 회개와 성화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도들은 그들의 간교한 설교에 속게 된다. 우리는 두 차원의 회개가 있다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없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로)돌아오라”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회개의 개념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31:06).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2:12).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간의 행위의 개념을 신약성경은 “회개”(메타노에오)라는 한 단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회개의 개념도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차원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구원(Salvation)을 위한 회개이고 또 하나는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한 회개이다.  

사도행전 초반에 나타난 사도들의 회개의 설교는 대부분 구원을 위한 회개를 다룬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회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다리를 통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니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곧 구원의 회개이다. 다른 길들과 다른 다리들을 향하여 걸어가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향하여 인생의 길과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구원의 회개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5:31)라고 선포했다. “임금과 구주”라고 했다. 더 이상 예수를 평범한 사형수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사회운동하다 실패하고 죽은 죄인이나, 나사렛 출신 저질 이단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죄와 사망에서 건지움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니 그길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 인격적으로 굴복하여 주인으로 영접하여 겸손하게 생명을 의탁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회개의 선포의 중심 내용이었다. 이 회개로 인하여 죄에 떨어져 실패한 에덴의 아담으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에덴의 아담이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도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도 바울도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라고 한 것이다.    

<회개를 언급하는 성경구절을 멋대로 도용할 뿐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에 빠진 그 목사들은 베드로의 이런 설교조차 바르게 해석하지 못한다. 전혀 엉뚱하게 제 멋대로 설교한다. “구원은 예수를 자기의 임금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가 임금인데, 어떻게 예수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임금이 싫어하는 일을 그대로 달고 살수가 있습니까? 임금이 싫어하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자기의 임금으로 삼은 사람이 예수가 싫어하는 죄를 그대로 둘 수 있습니까? 임금이라면서요? 그게 정말 예수 믿는 겁니까?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고, 목사라고 다 같은 목사가 아닙니다. 영혼을 죽이는 소경된 설교자들에게 영혼을 맡기지 마세요! 진짜로 구원 받은 사람일지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갑니다!”라고 거침없이 외친다.

참으로 살 떨리게 하는 강한 회개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는 베드로의 의도와는 전현 상관이 없는 설교이다. 베드로가 구원의 차원에서 언급한 회개를 그들은 성화와 영적성장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한다. 바로 여기서 복음의 중대한 변질이 일어난다. 구원을 위해 자기 지혜와 자기 노력을 버리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의탁할 것을 결단하는 구원의 회개와 영적성장과 더 깊은 성화로 나아가기 위한 성화의 회개를 혼탁하게 섞어서 외친다. 그러니 성도들이 구원과 회개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결국 그들의 구원이 시시때때로 출렁거리고 덜렁거리게 되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회개는 구원의 영속성을 훼손한다!>

더욱 중대한 사실은 그들의 설교에는 구원의 영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복음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 자신이 죄를 짓느냐 마느냐, 그리고 회개를 하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죄를 조심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에서 어떻게 건강한 성도가 태어나고, 자라고, 훈련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수시로 확실하게 구원 받은 성도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자주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서 외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하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5,6).

이 말씀으로 이미 구원 받은 성도의 구원의 박탈을 자신있게 말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이다. 사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구원에 지극히 합당한 삶을 풍성하게 가꾸어가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값없는 구원의 은혜와 풍성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을 다 알고 경험했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로서 그리스도를 다시 부인하면 비록 후에 회개할지라도 결코 이전과 같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신령한 관계를 얻을 수 없고, 그와 같은 믿음의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핍박이 거셀지라도 배교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라는 격려이며 동시에 경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상한 회개사상을 전파하는 신사도운동가들은 이런 중요한 말씀을 이미 얻은 성도의 구원의 박탈과 변개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본문으로 삼아 버린다. 그리고 은혜로 얻은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성도 자신의 역할의 지극히 중요하다는 근거로 삼는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니라”(요10:28).
“너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니라”( 요 10:29).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절대적 주권에 의한 성도의 구원의 영속성을 말하는 위의 말씀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가? 결국 그들의 가르침과 사상은 정확무오하고 우리의 신앙과 삶의 절대적인 절대적 기준이 되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사상과 운동이 마귀에게서 나왔다는 증거이다. 어떤 것이 아무리 근사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면 무조건 버려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도 진리일 수 있는 것은 우주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회개 설교로 영혼들이 시계추처럼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간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9)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이 우리의 신앙적인 행위와 신앙적인 선택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선물로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인간이 스스로 만들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 믿는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오래전에 택하셨고, 때가 되어 믿음 속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기대하시고 계시다. 인간의 그 어떤 조건에 근거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은 영혼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속하였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행위와 믿음에 구원의 유지가 달렸다면, 과연 처음 구원을 끝까지 유지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사람이 처음 구원 받고서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에 갈 때까지 시계추처럼 얼마나 자주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다가 마지막 한 곳에 안착하는 것일까? 신사도 운동의 복음은 우리 영혼을 이렇게 기구하고 불안스럽게 만든다.    

조금만 신경을 쓰고 들으면 그들의 설교에는 십자의 대속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하리만큼 그들은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지 않는다. 참 이상하게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회개의 외침은 Satanic하다. 십자가와 예수의 보혈이 없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아무리 예배와 기도와 찬양이 풍성해도 그런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교회가 아니다. 우리 구원과 구원의 영속성의 사유가 십자가와 보혈이라는 사실을 거의 강조하지 않는 목사들은 대부분 신사도운동에 미혹받아 진리에서 벗어난 그들이다.  

신사도 운동을 앞장서 전개하는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는 처음 예수를 믿는 단계에서부터 모든 죄를 회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이 들도록 설교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입장에 따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값없는 구원의 은혜, 오직 십자가를 부여잡는 믿음으로 인해 임하는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라는 구절을 그럴 듯하게 인용했다.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는 부분보다 “회개하고”라고 하는 부분이 앞서 있으니까 먼저 모든 죄악을 철저하게 회개한 후에 드디어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그때 구원이 임한다는 식이었다. 신사도 운동은 이렇게 복음을 왜곡한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그렇게 구원받았습니까? 아직 영혼이 죄 속에서 죽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은혜로 부어주시는 성령의 세례없이 어떻게 자기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과연 자기 죄의 몇 %의 회개해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갈 자격 생긴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끝가지 구원을 간수하여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더럽고 추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를 의지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아무 공로 없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합니다!”라며 진심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 받는다. 이것이 구원의 회개이다. 이 외의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작용하는 것은 없다. 다른 어떤 것도 추가할 인간의 것이 없다. 이것이 참 복음이고, 이것이 구원을 얻는 회개이다.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는 영적성장과 성화이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회개가 진정이었는지? 정말 그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것은 삶의 변화이다. 삶, 사상, 가치관, 세계관에서 성경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거듭난 영적생명의 성장이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구원의 회개가 확실할지라도 영적훈련이 아직 너무나도 미비하면 뚜렷한 변화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의 눈에 흔적이 없다하여 쉽게 죽은 영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확실하게 구원의 감격을 느끼는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성경적인 변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 좋은 좋은 예가되는 인물은 예수님을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이다. 그는 구원의 감격을 느끼는 순간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 19:08).

구원의 회개로 인해 거듭남과 새로운 생명을 얻고 나면 즉시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전까지 즐기고 좋아하던 죄에 대한 새로운 태도이다. 느낌이 달라진다. 서서히 결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시작되는 성화이다. 성령께서 성화의 역사를 시작하시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치 못한 오래 묵은 죄악된 습성들과 취미와 기질과 각 종의 죄들이 다스려지는 성화의 회개가 일어난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쉬지 않고 일어나는 과정이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활동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구원을 이룬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러나 신사도운동가들은 이 말씀을 성도의 구원의 불안정안 달랑거림으로 해석한다.

<성화의 회개는 일평생 지속되는 성령의 열매이다!>

신사도운동에 미혹된 불쌍한 목사들과 참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의 차이는 여기에서 극명하게 갈라진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구원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구분하지 않는다. 구원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동일시하거나 혼합하여 설교한다. 구원 받은 후에 성화와 영적성장의 도상에서 일어나는 회개를 지옥으로부터 건지움 받은 구원의 회개와 같은 차원에서 가르친다.

그리고 그 회개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구원을 유발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신앙적 공로와 조건으로 만들어 간다. 성화의 도상에서 죽기 바로 직전까지 이어지는 성화의 회개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도 전적으로 사람의 의지인 것처럼, 그때마다 천국과 지옥이 교차되는 것처럼 선포한다. 이것이 사탄의 계교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보가 더 큰 말씀의 변질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사도바울이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했던 일이 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성경에는 말씀을 변질하거나 왜곡하거나 더하거나 빼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런 일을 기어이 당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분명히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신사도운동에 빠진 불쌍한 목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빗나간 회개를 반복하는 사람들에게서 다 나타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일지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 마치 벌건 대 낮에 강도가 기승을 부리듯이 버젓하게 그런 설교를 하고 다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순진하고 우매한 성도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은혜 없는 종이 되어간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끝까지 구원을 유지하는 사람은 2% ~ 15%에 불과하다고 그 자칭 사도가 입신하여 천국을 보고 온 사람들의 간증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시니 더욱 오금이 조리고 떨릴 것이다.              

구원의 여정에서의 회개와 성화의 여정에서의 회개는 다르다. 성화의 여정은 일평생이며, 성화의 회개도 일평생의 일이다. 전혀 열매가 없는 나무는 산 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이듯, 전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러나 성화의 회개가 더디고 느리다고 해서 그가 죽은 영혼이거나, 지옥에 떨어질 영혼이라고 설교하면 안 된다. 영혼이 분명히 거듭났을지라도 영적훈련이 시작되지 않았거나 미약하면 행동과 성품과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보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다!>

아무리 믿음이 게으르고 열매가 없을지라도 다시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설교할 수 없다. 성도의 영혼의 보존은 성도 자신의 노력과 힘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영속은 인간 자신의 행위와 믿음에 달린 것이 결코 아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았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롬 5:8).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에 우리 영혼에 이미 미쳤고, 아무 공로가 없음에도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주권적으로 구원하셨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성도의 영혼의 보존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 성도의 구원의 영속성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달렸다.

마귀는 절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도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있는 구원받은 성도의 영혼을 빼앗지 못한다. 만일 마귀가 우리의 죄나 다른 어떤 다른 수단으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내어 다시 지옥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못 믿겠다. 나를 마귀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그가 왜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부분에서 마귀와 타협하거나 협상하지 않으신다. 마귀는 하나님의 그 영역을 절대로 넘보지 못한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 1:12).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8:39).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아무도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한번 영생을 얻은 자는 다시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인간의 머리는 이 진리를 이해하고 담기에는 너무나 작다. 그래서 나도 어리석게 이전에 이 진리를 바로 가르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마귀는 하나님이 택하신 영혼을 건드리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죽였다 살렸다 변덕을 부리시지 않는다. 마귀는 우리에게 고난을 줄 수 있을지라도 영혼을 빼앗거나 죽이지는 못한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신사도운동 교회의 이단 목사들의 사상은 마귀의 힘을 찬양하는 악한신학이다. 마귀가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에 걸려드는 대부분의 불완전한 성도들이 다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구원하는 하나님이나, 다시 지옥에 가도록 만드는 마귀나, 서로  잡아당기는 방향이 다를 뿐 단순 능력으로 치자면 누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신사도운동은 이런 방식으로 마귀를 높인다.

사랑하는 자녀가 지옥가게 되어도 그대로 방관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죄에 빠진 자녀를 회개하도록 책망하시고 때리시기까지 하심으로 기어이 건지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빼앗기지 않는다. 불순종의 죄를 짓고 도망간 요나를 깊은 물에 던져지게 하시고, 큰 물고기가 삼키게 하시고, 다시 뭍으로 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영혼과 지옥과 천국, 모든 것을 다스리고 주관하신다. 주권과 권능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마귀와 공유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신사도 운동은 어느 정도 죄를 회개하고 도덕적 영적 수준이 평균은 넘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그래야 구원이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성경은 모든 죄인들이 조건없이, 값없는 은혜로 피 묻은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만 회개하는 것처럼 강조한다. 각자가 회개하고 안하고에 따라 영혼의 생사가 갈린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회개하여 은혜에 이르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확실하게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영혼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과 은혜에 근거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죄인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진부한 주제라고 가르친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회의 질이 떨어지고 성도들이 저질로 전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십자가를 통해 부으시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이다.  

<신사도운동은 기독교의 핵심을 약화시킨다!>

생각을 조금만 하면 신사도 운동의 성경을 파괴하는 악한 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대도 많은 목회자들이 구별하지 못하고 성도들을 경계시키지 않고 있다. 신사도운동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성령의 인도하심, 보혈의 권능을 약화시키거나 실종되게 하고 있다. 그 대신에 자력구원, 자력갱신, 자가회개를 가르친다.

그들의 최고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있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다양한 모든 것들이 풍성하게 넘치고 있다. 더욱 뜨거운 기도, 더욱 빈번한 회개, 뼈와 살까지 다 녹이는 굉장한 찬양, 여름보다 뜨거운 단기선교, 매 주일 이웃 교회에서 이탈하여 몰려오는 교인들이 넘친다. 이것을 부흥이라고 자랑한다.  

과연 그들의 중심에 피 묻은 십자가가 있는지 보라! 과연 그들의 의가 십자가를 통하여 받은 의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의 시작이고 근거이고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 교회들의 의는 자신이 회개하는 행위를 통하여 얻고, 계속 회개함으로 유지되는 의이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다. 이상하게 여러 면에서 그들의 색채는 구약적이다. 갈보리 언덕에 피 묻은 십자가가 서기 이전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빼 박은 사람들이다.

그것이 신사도 운동 교회의 신앙이다. 특히 그들의 회개도 구약적이다. 그들의 많은 설교들과 핵심 주장들을 보노라면 지금 우리가 신약 교회에 속했는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결국 하면 할수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멀어지게 만들고 있으므로 신사도운동의 회개도 짝퉁인 것이 분명하다.



2009.12.04 정이철 목사님 http://www.cantoncrc.com/
posted by isaiah_43 2011. 8. 27. 23:50